[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반세기 웃돌아 꼬박 59년 만에
잃어버렸던 70m 구간 되찾아
‘대한독립만세’ 외쳤던 ‘대한문’
구한말 뼈아픈 근대사 깃들어
대한제국 슬픈 역사 지닌 궁궐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덕수궁을 에워싼 돌담길 중 영국대사관 정문과 후문에 막혀있던 구간이 전면 개방되면서 덕수궁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 더 가깝게 체험할 수 있게 됐다. 반세기를 웃돌아 꼬박 59년 만에 덕수궁 둘레길 전 구간이 이어진 셈이다.

봄 날씨처럼 포근했던 설 연휴 덕수궁 대한문에서 출발해 돌담길, 영국 대사관 후문을 지나 서울시청 맞은편 세종대로 방면까지 덕수궁 일대를 거닐어 봤다. 한참을 걷다 보니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의 역사를 느껴보니 궁궐 곳곳은 아련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대한제국의 살아있는 역사 ‘덕수궁’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됐다. 처음엔 임진왜란 당시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조선 제14대 왕)에 의해서다. 당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전소되는데,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는다. 그리고 ‘경운궁(慶運宮)’이라 불렸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건, 조선 말기 러시아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부터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다.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정도 크기였다. 하지만 고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 불리게 된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다.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은 빠르게 해체·축소됐다.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중구 덕수궁을 찾은 시민들이 돌담길을 따라 걷고 있다. ⓒ천지일보 2019.2.8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중구 덕수궁을 찾은 시민들이 돌담길을 따라 걷고 있다. ⓒ천지일보 2019.2.8

◆대한독립 외친 ‘대한문’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다. 하지만 동쪽에 큰 도로가 생기면서 인화문이 사라지고, 동쪽문인 ‘대안문’이 정문으로 사용됐다. 이후 ‘대한문(大漢門)’이라 불리게 됐다. 대한문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다. 1919년 3월 1일. 이곳 대한문 앞에도 흰옷 입은 군중들이 모였다.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마음 모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대한문을 보고 있자니 함성을 외치는 선조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고종의 커피 향 가득한 ‘정관헌’

흔히 ‘궁궐’하면 나무 기둥에 기와를 얹은 건물을 생각한다. 하지만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돼 있다. 대한제국시대에 여러 가지 서양건물이 들어오게 되면서 이곳도 서양식으로 지어졌다. 정관헌은 고종이 커피를 마시던 장소로 유명하다. 지금은 텅 비었지만, 사랑하는 가족, 외국 사신과 함께하는 고종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 ‘솔솔’ 커피 향마저 느껴진다.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황궁의 대표적 서양 건축물 ‘석조전’

석조전은 접견실과 대식당 등 공적인 공간과 침실, 그리고 서재 등 황실 가족의 생활공간이 갖추어진 대한제국의 대표적 서양식 건물이다.

고종이 석조전을 짓기로 한 것은 세계만방에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한 직후인 1897년도였다. 세계만방에 선포했으니, 부끄럽지 않은 건물이 필요했다. 이에 20세기를 전후해 영국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에 따른 멋진 건물이 덕수궁에 들어서게 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래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내부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됐다. 이후 2009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됐다.

◆‘일제 침략 상징’ 비운의 장소 중명전

덕수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중명전은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황실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서재 역할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에 큰불이 나면서 고종이 머무는 편전이 됐다. 또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겼던 을사늑약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아픔을 품은 상징적인 건물로 남게 됐다. 궁궐의 정전이건만, 식민지시기에 망가진 모습이 아직도 회복되지 못해 담장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달랑 문 하나만 달고 오늘도 쓸쓸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역사의 잔상 깃든 ‘고종의 길’

돌담길을 따라 덕수궁 후문을 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에 ‘고종의 길’이라 쓰인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듬해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이어(移御)했다고 전해지는 길로,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구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정확한 고증은 어렵다. 구한말 미국 공사관이 만든 지도에 ‘King's road(왕의 길)’라 적혀 있어 근거로 삼았다 한다.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서울 한복판에는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딘 덕수궁(德壽宮)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궁궐에는 낭만 어린 돌담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뼈아픈 근대사도 서려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것 같다. ⓒ천지일보 2019.2.8

이처럼 덕수궁은 구한말 쓰러져가던 우리의 슬픈 역사를 미처 다 알지는 못해도 큰 울림을 준다. 오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슬픔과 아픔이 깃든 궁궐 덕수궁. 그날의 아픔을 기억해 달라는 걸까.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듯 덕수궁은 오늘도 도심 사이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다.

우리는 전통을 회복하고 역사를 되살려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마음에 새기며 대한제국의 가슴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자 근대 역사의 문화유산이 있는 이곳 덕수궁을 한 번쯤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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