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2월 8일 지배국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식민지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독립선언이 이뤄졌다. 이 소식에 조국의 지식인들은 큰 충격과 자극을 받았다. 소식을 접한 천도교 손병희 선생을 주축으로 33인이 결성돼 기미독립선언서가 작성됐다. 아이러니하게도 3.1운동 당일 독립선언서를 읽은 주인공도 민족대표 33인이 아닌 학생 정재용이었다. 33인은 파고다공원에 모인 인파를 보고 유혈사태를 우려해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세 운동이 예정된 오후 2시가 돼도 민족대표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자 학생 정재용이 파고다공원 팔각정에 올라 가슴에 품었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누군가 조심스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내 10년간 일제 군홧발에 짓밟힌 우리 겨레의 한이 ‘대한독립만세’ 외침으로 터져 나와 한반도를 뒤덮은 사건이 3.1운동이다. 

100년 전 깨어 있는 한 사람이 청년 몇 명을 움직여 2.8독립선언을 했고, 그들이 조국에 있던 지식인을 움직인 결과가 3.1운동이 됐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자신감을 갖게 된 독립운동가들은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전 세계에 일제의 국권수탈을 알리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외쳤다. 상해 임시정부는 ‘민주 공화국’임을 선포했고, 이는 오늘날 헌법 제1조 1항이 됐다.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일제 패망 후 승전국들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권력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의 모태로 평가받고 있다. 

적국의 심장부에서 진행된 2.8독립선언을 많은 이들은 기억하지 못하고 3.1운동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2.8독립선언이 있었기에 3.1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는 데 이견을 다는 이는 없다. 

2.8독립선언은 앞서 만주 지린에서 발표됐던 무오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았다.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이 동경에 파견돼 유학생들을 지도해 이뤄지게 됐다. 김규식이 있었기에 2.8독립선언도 이뤄진 셈이다. 

2.8독립선언은 용기를 내어 시작하는 사람이 있기에 세상이 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꼭 100년이 된 오늘만이라도 적지만 작지 않은 족적을 남긴 청년들의 의기를 가슴깊이 기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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