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아들 내외가 아비의 생일마저 잊어버린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자 노인은 분노와 슬픔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얀 놈들! 검버섯이 핀 뺨을 실룩거리던 노인은 이윽고 떨리는 손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매우 특별한 부탁’을 대행하는 ‘심부름센터’의 번호였다.

#그한테는 늦게 본 아들이 하나 있었다.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 아들이 입대하기 얼마 전에 암으로 돌아갔다. 애당초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아들은 3수 끝에 전문학교를 다니다 입대를 했다.

아들이 어떤 여자애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건 제대를 하고 복학한 지 석 달 만이었다. 여자애는 깜찍하게 생기긴 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반지랍기가 오래된 기름집 됫박 같았다. 아들은 데리고 들어온 여자애를 가리키며 남 이야기하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애를 뱄대나 봐요.” 그는 입이 딱 벌어졌다. 배가 불러오는 여자애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마치 길바닥에서 새끼줄 하나를 주워온 것처럼 말하다니! 그는 이런 아들의 소행에 기가 막혔지만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일은 벌어진 것, 여자의 근본을 살필 처지도 아니었다. 아들 말로는 여자가 어떤 지방대학의 3학년에 다닌다고 했다. 그것도 ‘독학’으로!

그래서 그는 삼신할머니가 손이 귀한 집안에 내린 축복이라고 애써 자위하고는 서둘러 둘을 결혼시켜버렸다. 결혼 직전 두 사람은 본인들의 뜻에 의해 모두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이윽고 며느리가 몸을 풀었다. 그가 바라던 고추였다. 손자가 태어나자 아들과 며느리의 콧대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또 콧김도 세어졌다. 고추를 낳은 게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아들 내외는 거드름을 피우며 설쳐대었다. 그는 왠지 앞날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내외는 손자를 무기로 내세워 그의 재산을 미리 물려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는 핏줄이라는 무기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비의 재산을 물려받아 부동산 임대업을 시작한 아들은, 그러나 갈수록 아비의 안위를 챙기기보다는 제 마누라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아들이 이 꼴이니 늙은 시아버지를 대하는 며느리의 태도는 불문가지였다. 차라리 대놓고 구박이라도 하면 또 몰라, 반지랍기가 이를 데 없는 며느리의 언행은 심봉사를 대하는 뺑덕어미만큼이나 교활하고도 음흉했다.

이를테면 모처럼 입맛이 당겨 그가 밥숟가락이라도 좀 재게 놀릴라치면 며느리는 생글거리며 간드러진 얼굴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유, 아버님. 그처럼 식사를 잘하시니 이제 검은머리가 다시 생겨나겠네요.”
그가 아들네 집에서 나와 따로 살게 된 건 이런 연놈들의 되먹지 못한 소행 때문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남부럽지 않게 자수성가를 한 그의 자존심 또한 한몫을 단단히 했지 싶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재산을 몽땅 물려주지 않고 자신이 쓸 만큼은 남겨둔 대비책이었다. 그가 모진 결심 끝에 생일을 자축하기로 마음먹은 건 이런 저간의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이었다.

#노인의 생일잔치는 기대 이상이었다. 아들 내외는 천하의 ‘효자 효부’가 되어주었고, 손자는 할아버지 앞에서 더할 나위 없이 귀여운 재롱을 피워대었다. 물론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는 모두 ‘임대가족’이었다. 또한 그 역할이 각본에 따른 순전한 연극이었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노인은 그 시간만큼은 정말 행복했고, 진짜 다복한 할아비가 된 듯 즐거웠던 것이다. 이런 만족감에 비하면 조금 많을 듯도 싶은 행사비용 따위는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진짜 아들네’는 수십억의 재산을 물려받았는데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자상한 말 한마디조차 건넬 줄 모르던 남보다도 못한 핏줄이지 않던가. 게다가 이젠 혼자 따로 나가 살고 있는 제 아비의 생일마저 까맣게 잊고 사는 불효막심한 놈들이 바로 아들 내외였던 것이다. 그래, 차라리 너희들이 백배 났다.

계약 시간이 끝나 ‘임대가족’과 작별하는 노인의 눈에서는 이윽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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