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세계 주요 20개국(Group of Twenty) 정상들이 서울에 모였다. 유엔(UN) 사무총장도 한국에 왔다. 주요 국가들이 다 왔기 때문에 사실상 세계가 서울에 모인 셈이다. 유사 이래 이런 일이 있었던가. 우리가 주요 국가 반열에 올라서서 서울에 세계 정상들을 대거 불러들일 수 있으리라고 꿈이나 꿀 수 있었던가.

국가 원수들만 온 것이 아니다. 세계 경영을 선도하는 거물 기업 최고 경영자(CEO) 120명도 서울에 왔다. 2009년 기준으로 연간 4~5조 달러의 매출액을 창출해내는 기업인들이다. 이만한 매출이라면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5배를 넘어서며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한 규모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의 서울 모임은 세계 실물 경제의 정상회의라 부를 수 있다.

비즈니스 서밋(Business Summit)이다. 이런 일을 해낸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럽지 않은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천 명의 대규모 수행원을 거느리고 입국했다. 서울에서 사용할 무장방탄 전용차까지 싣고 들어왔다. 러시아 영국 중국 일본의 정상들도 수백 명씩의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에 왔다. 서울 G20 회의에 임하는 각국의 철저한 준비와 결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그저 가벼운 관광이나 정상들 간의 유쾌한 사교를 위해 서울에 온 것이 아니다. 총성(銃聲) 있는 전쟁만큼이나 시끄럽고 치열한 전쟁(錢爭)을 치르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서울에 왔다.

전쟁(錢爭), 그것은 돈 싸움의 국제 대회전(大會戰)이었다. 2천여 명의 외신 기자단들도 입국했다. 지난 1988년에 치른 올림픽이나 2002년 월드컵 때 입국한 외신 기자단 규모에 버금가는 규모다. 목을 빼고 귀를 세워 모든 나라 국민들이 한국을, 그리고 서울을, 의장국인 우리가 회의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를 바라보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 정도의 대국제회의를 치르고 나서도 한국이 지구의 어느 구석에 있는지 모를 세계인이 있을까. 서울이 북한에 있는지 한국의 수도인지 모를 사람이 있을까.

G20 서울 회의는 예고된 큰 전쟁터였다. 서울 회의 훨씬 이전에 터진 미국과 중국의 돈 싸움이 계속돼 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서울 회의에 앞선 장외 전투였다. 서울 회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줄 우려가 큰 싸움이었다. 빌미는 미국과의 무역에서 큰 흑자를 보는 중국이 제공하고 포문은 누적되는 적자를 견디지 못한 미국이 열었다.

미국은 중국의 위안화가 시장의 실제 가치보다 저평가돼 있으므로 큰 폭의 절상(切上)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압박했다. 중국은 이에 강하게 맞섰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위안화의 저평가 탓이 아니며 미국의 경제구조, 상품의 경쟁력 저하에 원인이 있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세계가 소란스러워졌다. 세계가 G2의 고래싸움, 돈 싸움, 통화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 중국은 이렇게 말싸움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것처럼 하면서도 뒤로는 슬슬 위안화의 절상 조치들을 취해 나갔다. 서울 회의에 대비한 명분 축적이었다.

드디어 서울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와 후진타오가 맞붙었다. 오바마가 위안화 절상을 거론하자 후진타오는 위안화 절상이 그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주목하라며 예봉을 피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달러 가치 하락을 유도하기 위해 찍어낸 6천억 달러의 이른바 양적 완화조치에 대해 추궁했다.

오히려 서울 회의의 공식적인 링(Ring)에 올라와서는 공수(攻守)가 뒤바뀐 느낌마저 들었다. 미국이 서울 회의에 앞서 취한 달러의 양적 완화조치가 시기를 잘못 잡은 결정적인 악수였다. 더구나 독일과 브라질이 미국의 입장을 벗어나 중국과 호흡을 같이 함으로써 미국을 어렵게 했다.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이 세계 문제를 좌지우지하기엔 벅찬 시대가 온 것인가. 미국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에서도 한국을 지나치게 말랑말랑하게 보았던 것 같다. 한미 정상 간에 FTA 협상을 타결 지으려 했던 계획도 차질을 빚고 말았다. 미국은 이번 서울 회의에서 크게 챙긴 것이 없다. 그렇다고 크게 잃은 것도 없다. 미국의 역할이 퇴조하고 있다고 볼 것도 없다.

서울 회의의 스타(Star)는 단연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의장국이라는 프리미엄 덕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G20의 의장으로서 시종 당당하고 용의주도하며 세련되고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상적이었다. 한복에 우아하고 환한 미소로 한류, 한식, 우리 문화예술을 알리기에 바빴던 퍼스트레이디 김 윤옥 여사의 내조외교도 돋보였다. 정상외교를 뒷받침한 우리의 국력과 국격을 잘 드러내 주었으며 그에 잘 어우러지고 조화되는 것이었다.

새삼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세계 속에서 한국과 우리 자신이 어떻게 자리매김 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우리 국민의 저력도 놀라웠다. 교통대란을 걱정했지만 회의장이 있는 강남은 말할 것 없고 강북까지도 혼잡은 없었다. 우리 국민이 유사시에 보여주는 저력과 우수성, 사려 깊음,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적인 배려를 잘 반영해 주었다.

서울 G20 회의는 실타래 같이 얽힌 세계 경제 현안을 푸는 데 굳건한 토대가 될 ‘서울 선언’과 ‘서울 액션플랜’을 채택했다. 그것은 큰 성과다. 특히 서울 회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뻔한 환율문제를 뚜렷이 진전된 방법으로 봉합했다. 경상수지 가이드라인의 기준을 마련하자는 데도 합의했다. 그렇지만 정말 큰 성과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세계 정상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었다는 새로운 한국과 우리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다.

서울 회의로 우리는 새로운 한국, 새로운 미래의 길에 들어선 한국과 한국인을 세계에 선포했다. 그 자부심과 감동과 감격이 무엇보다 큰 성과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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