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올겨울 들어 밤사이 첫눈이 많이 내렸다.
                      
우리 집 작은 마당에 쌓인 눈 위에 메마른 은행나무 잎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마치 화이트 케이크에 뿌려 놓은 장식품 같았다.

눈은 멎었고, 영하의 날씨라지만 나는 아침 일찍 서둘러 식구들 밥을 챙겨 놓고 가게로 나갔다. 예전 같지 않은 불경기의 여파가 바로 눈앞에 다가섰다. 도심의 거리 어느 곳을 가나 지난날의 활발했던 생기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가게 문을 열어 놓고 보도에 쌓인 눈을 말끔히 쓸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지만 단 한 잔의 차도 팔지 못했다. 남편의 박봉이 힘들어 아이들 학비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빚을 내어 차린 찻집이었다. 지금은 보증금까지 잘라먹고 있어 후회가 막심했다.

언제부터인지 내 가게 앞에 한 노파가 좌판을 벌여 놓았다. 노파의 꾀죄죄한 입성으로 보아 궁핍한 생활이 짐작되었다. 좌판은 조그만 제각각의 바구니에 홍당무, 고구마, 깐 마늘, 갓 다듬어 놓은 것 같은 대파 두 단, 알밤 세어 되박이 전부였다. 돈으로 따지자면 보잘것없지만 노파에게는 소중한 물건인 듯했다.

노파의 남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자식은 있는가? 아니면 홀로 사는가? 삼십 대에 일찍 과부가 된 나의 친정어머니도 만약 자식들이 없었다면 노파처럼 차가운 거리에서 좌판을 벌여 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파는 가끔 창 밖을 내다보는 내 시선과 마주칠 때면 어설픈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는 남의 가게 앞에 좌판을 벌려 놓은 미안함이었다.

어쨌든 동네나 시장 입구도 아니고, 관청 건물이 있는 우리 가게 앞에서는 노파의 물건이 쉽게 팔릴 장소는 아니었다. 나는 시장 입구 쪽으로 장소를 옮겨 보라고 조언을 해주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자칫 그 자리를 내쫓기 위한 술수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노파가 신경 쓰지 않도록 아예 창밖을 내다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후 4시가 넘어서자 거리에는 세찬 바람을 동반한 진눈깨비가 다시 쏟아지고 있었다. 노파는 거리의 혹한에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거리에서 떨고 있는 노파에 비하면 따뜻한 가게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나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벌써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노파가 궁금해 밖을 내다보았다. 노파가 있던 자리는 텅 빈 채였다. 어디로 종적을 감추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했을 텐데’라는 공연한 때늦은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면 노파와 나는 하루 종일 개시도 못 한 셈이었다. 노파가 있던 빈자리에는 성긴 진눈깨비만 잔뜩 쌓여 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차가운 비수가 싸늘하게 가슴을 찌르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한파의 거리에서 떨고 있던 노파를 진작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 뜨거운 차 한 잔 권하지 못한 게 몹시 후회로 다가왔다. 차를 한 잔도 팔지 못했지만 하다못해 노인의 좌판에 밤이나 대파 한 단이라도 사 주어야 했다.

타인의 어려움을 배려하지 못한 내 자신을 몹시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옆 가게 문방구 아주머니가 검은 비닐 봉투 하나를 건네주고 갔다. 좌판을 벌인 노파가 조금 전에 부탁을 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비닐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홍당무 다섯 개와 밤 한 되 정도 그리고 서투른 필체의 쪽지가 나왔다.

-찻집 아주머니 정말 고마워요. 자리를 비우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해 자리 세를 못 주네요. 보잘것없는 물건이지만 직접 주면 받지 않을 것 같아 옆 가게에 맡기고 갑니다. 가족들과 내내 행복하세요.-

행복이라는 글씨에 머문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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