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작가

어느 유명한 화가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자신의 최고의 걸작품 한 점을 도둑맞았다. 이 소식은 금세 사람들에게 퍼졌고, 마침내 그의 친구들까지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가슴 아파해야 할 본인은 태연했다. 그 이유가 궁금한 친구들은 그에게 물었다.

“자넨, 지금 도난당한 작품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모르는가?”
“물론 그 가치는 내가 그렸으니 잘 알고 있지.”
“그래?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가?”
“내가 태연한 게 이상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자네들이네. 나는 그 그림보다 더 중요한 재산이 있다네.”
“그런가? 더 값비싼 그림을 또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닐세. 내가 도난당한 그 그림은 비유를 하자면 내가 발행한 수표에 불과하네. 내 진짜 재산은 여기 있어.”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림은 바로 이 재산에서 창조된 걸세. 비록 나는 좋은 작품을 잃었지만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작품이 탄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알이 아니라 알을 낳을 수 있는 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주 작은 의미의 부자에 불과하다. 진짜 부자는 마음가짐과, 아이디어, 삶의 태도 등에 있다. 그게 바로 당신 안에 숨어 있으면서 무엇인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잠재능력이기 때문이다.

<여성동아>라는 잡지를 통해 홍라희는 삼성의 3세들 교육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상상력과 창의력이라고 말했다. 이병철은 이건희 이후의 3세 경영까지 고려하면서 창의력과 감성이 풍부한 홍라희를 이건희의 배우자로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홍라희는 그의 기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결혼보다는 미국 유학을 가 미대 교수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결혼으로 인해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자 그녀는 그의 둘째 딸인 이서현에게 자신의 감성과 창의력을 심어주면서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랐다.

그렇게 이서현은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미술에 각별한 취미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미술에 있어 소질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의 교육이 더해져 이서현은 미술대회에서 몇 차례 상을 타기도 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보였다. 결국 그녀는 서울예고에 진학해 미술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스쿨에 진학해 디자인을 배웠다.

삼성가는 미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이병철과 이건희 그리고 3세들에게까지 미술에 대한 애정을 살펴볼 수 있으니 그 애정의 깊이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기업을 운영하는데 미술에 대한 애정이 쓸모가 있는 건가?”라는 질문을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과거에는 별 상관이 없었을 수도 있다. 과거의 기업은 그저 대량생산만을 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졌다. 모든 기업의 기술이 동등해졌다. 이런 상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디자인이다. 여기에 삼성가만의 특별한 경쟁력이 있다. 삼성가는 대를 이어 미술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이라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나아갈 바를 이야기하며 “이젠 삼성의 제품이 해외 브랜드와 비교해 기술적으로는 뒤지지 않는데, 디자인이 떨어져 경쟁력이 없다. 21세기는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세기다”라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홍라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삼성디자인연구원(IDS)이나 디자인 교육기관 SADI 등을 설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맘에 드는 옷을 산 뒤엔 그 디자인을 분석해 디자인실에 조언하기도 하는 등 많은 애정을 보여왔다. 골프 의류 ‘아스트라’가 나왔을 때는 직접 골프모자의 디자인을 제안해 ‘홍라희 캡’이라는 별칭이 붙은 모자가 나오기도 했다.

창의력이란 도둑맞을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를 통해 강조했듯 자신이 그린 작품이 도둑을 맞아도 작가가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창의력은 도둑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작가는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창의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창의력은 무한한 가능성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병철이나 이건희가 자녀들 교육에 있어 창의력을 강조한 것이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 늘 아이들의 뺨을 비빌 정도였던 이건희가 공부에 시달리고 있는 몹시 수척해진 이재용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굳이 서울대를 가야 하느냐? 운동도 하면서 다양하게 살아라.”
대기업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라면 보통 한국에서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건희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해도 괜찮다는 입장으로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 자녀 교육의 세세한 부분은 모두 홍라희의 몫이었다. 홍라희가 창조적인 아이를 만드는 교육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문화 교육법이다. 그녀는 문화를 대하는 자세는 결국 문화적 감수성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감수성은 아주 어릴 때부터 길러져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 어려서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을 체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어린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예술작품을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규칙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홍라희가 어린 시절부터 이부진과 이서현에게 창의력을 심어줄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교육법은 생활 속에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갖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삼성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그녀들에게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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