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금경축을 맞은 방학길 신부. ⓒ천지일보(뉴스천지)
사제 서원 50년 ‘금경축’ 맞아
순교자 많은 6대 천주교 집안

[천지일보=이지수 기자] 천주교에서는 세속의 삶을 끊고 정결, 청빈, 순명을 따르며 평생토록 하느님을 위해 살겠다고 서원한 지 50년이 되면 이를 금경축이라 한다.

올해 금경축을 맞은 방학길(73, 말셀로) 신부를 서울 성북동에 있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만났다.

그의 자상하고 따뜻한 말투와 인상이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를 만난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했다. 그리고 편안하고 겸손한 모습에서 50년의 수도자로서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고조할아버지를 비롯해 6대째 천주교를 믿는 저희 집안에는 무명의 순교자들도 많아요. 하지만 저는 수도원이 뭔지도 몰랐어요. 신부가 될 생각도 전혀 안 해봤죠.”

방 신부의 집안에는 삼촌과 고모를 비롯해 신부와 수녀가 많다. 하지만 그는 수도생활과 신부로서의 삶을 원하지 않았다.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하고 운동을 즐겨 하던 방 신부. 한국전쟁 당시 부산 영도 청학동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편지봉투하나를 주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서울에 수도원이라는 곳이 있단다. 거기 가면 수사들이 모여 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자급자족하며 사는 곳인데 여러 가지 기술도 알려 준단다. 기술도 배울 겸 3개월만 그곳에 있다 오너라.”

▲ 방학길 신부가 수도회 입구에 순교성인103위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이 말을 들은 방 신부는 당시 부산 영도 청학동에 있는 본당 주임신부를 찾아가 아버지에게 받은 봉투를 내 밀었다. 그 봉투는 수도원 입회원서였다. 하지만 주임신부는 그가 내민 원서를 그 자리에 찢어버리고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 후 계속 찾아가기를 여러 번. 그때마다 거절당했고 방 신부도 점점 오기가 생겼다.

“원래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수도원이 뭔지 신부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오로지 오기가 발동해 주임신부님이 나를 받아주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결국 주임신부는 원서를 받아줬고 그의 수도원 생활이 시작됐다. 방 신부는 그의 아버지가 왜 자신을 수도원에 보냈는지 오랜 후에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성직자가 귀한 시절 자녀를 성직자로 키워내면 그것처럼 큰 영광이 없다고 여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를 성직자로 만들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방학길 신부가 50년을 성직자로 살게 한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1957년 8월, 20세에 들어간 수도생활 첫날. 고된 일과를 모두 마치고 하는 끝기도 시간이었다.

“끝기도 후 마지막에 일과가 끝났으니 이제 편히 가서 쉬라는 뜻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었어요. 원장신부님부터 시작해 앞사람부터 뒷사람으로 가면서 꼭 끌어안는 모습을 보던 중 갑자기 앞이 흐려졌어요. 그러면서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고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어요. 복받치는 감격 때문에 울음을 참느라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였죠. 제가 제일 뒤에 앉았었는데 앞에 계신 분이 저를 꼭 끌어안으시면서 ‘말셀로라고 했지? 잘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어요.”

당시 방 신부는 천상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이 그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있을 수 있나’라는 생각을 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3개월만 있다가 집에 돌아갈 생각으로 가지고 왔던 화려한 옷가지들을 다 태우고 검정 고무신과 작업복만 달라고 해서 입었다. 이름도 세례명으로 바꾸면서 그는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고 했다.

동료들에게 수도생활에 대한 용어, 규칙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도생활 시작한 지 만 4년째 되던 해 첫 서원을 하게 됐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시작된 수도자의 삶이 지금까지 50년이 된 것이다. 그는 첫 서원하기까지의 4년여 동안 자원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모든 삶을 청산하고 아픈 것과 힘든 것도 잊고 감격스러운 최고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방 신부는 어느 날 천당에 가면 어떤 모습으로 살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원장신부에게 가서 이렇게 물었다. “신부님,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천태만상이잖아요. 불구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맹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천당에서도 맹인이고 불구로 살아가는 건가요?”

그리고 천당에서는 그 사람이 살았던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대답을 원장신부에게서 듣게 된다.

“천당 가면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의 모습이라면 저는 저의 그 4년이라는 시간동안의 모습으로 살게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외부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방 신부는 해병대에 지원했다. 워낙 규칙적인 수도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군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손재주가 좋은 그는 수도원에서 철공 일을 13여 년간 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했던 형구들을 최초로 복원해 양화진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일은 자신이 신부가 되도록 하느님이 은총을 내려주신 계기가 됐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에게 신부가 되는 것은 감히 오르지 못할 산과도 같았다. 하지만 원장신부는 그에게 신부가 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신학대에 입학하게 되지만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한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처음 배우는 라틴어가 너무 어려워 남들은 1년이면 마칠 과목을 그에게는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신학대 생활 내내 계속되던 재시험들….

하지만 힘들었던 신학대 과정을 이겨낸 그는 드디어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81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 용산구 이촌동 새남터 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를 역임했다. 50년간 수도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인간관계라고 말했다.

“제가 사람을 보고 수도생활 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하느님과의 약속이었고 오로지 그것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저의 최종 목표였죠.”

그는 후배 신부들에게도 하루에 한 번씩 드리는 성모일도와 매일 드리는 미사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것은 꼭 지켜야 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신부가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는 방학길 신부.

그는 “수도원 생활을 하게 되고 신부가 될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제가 오늘날 신부가 된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입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태어나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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