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룻배(단원 풍속도첩)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19.1.20
나룻배(단원 풍속도첩)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19.1.20

민속박물관 조사보고서 발표

한강 어로 문화 자세히 담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물 위에 띄운 하나의 ‘강배’. 지금은 선조들의 옛 모습과 연관 짓거나 웃어른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오늘날 서울의 옛 모습의 중요한 일부분이자, 한강의 어로문화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강배다.

◆다양하게 불린 ‘강배’

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발표한 ‘한강수로와 어로문화’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한강에서 운행했던 강배는 현지에서 ‘거루’ ‘늘배’ ‘돛배’ ‘장삿배’ 등 다양하게 불렸다. 그중에서 ‘거루’와 ‘장삿배’가 많이 불렀다.

그래서 소금이나 새우젓 등을 싣고 운행하는 배를 ‘장사거룻배’ 또는 ‘소금배’라고 불렀다.

고기를 낚는 배는 ‘낚거루’라 했다. 다만, 나루에서 운행하던 물을 가로 지르는 배에는 ‘거루’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나룻배’ 혹은 ‘줄배’라고 했다. 그리고 장사 배를 구분할 때, 한 사람이 운행하는 배를 ‘엇거루’, 두 사람이 운행하는 배를 ‘두손거루’, 세 사람이 운행하는 배를 ‘세손거루’라고 했다. 그러나 ‘거루’ 사전적인 의미는 돛이 없는 작은 배를 일컫는다.

◆강배 물에 띠어졌다

먼저 조선시대 한강에서는 배를 이용해서 재화나 물품을 운송했다.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에서는 서해안을 통해서 한강 하류와 연결해 물류를 운송했다.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그 수로가 통하는 남한강과 북한강을 이용해 물류를 한양으로 운반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인 경제체제였던 조선시대 한강 수로를 이용한 물류는 조세로 징수한 현물을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조운(漕運)이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조세로 거둔 곡물이나 직물을 배로 운송하던 일을 참운(站運)이라 해 바다를 통한 해운(海運)과 구별했다. 한강 참운은 춘천, 원주, 충주 등에 세곡 수송과 보관을 위해 수로 주변에 조창(漕倉)을 두고 각 지방에서 거둬들인 조세를 모아 배를 이용해서 운송했다.

남한강과 북한강에서 조창으로 활용된 창고는 충주 가흥창(可興倉), 원주 흥원창(興原倉), 춘천 소양강창(昭陽江倉)이었다.

팔당대교에서 본 한강(출처: 국립민속박물관)ⓒ천지일보 2019.1.20
팔당대교에서 본 한강(출처: 국립민속박물관)ⓒ천지일보 2019.1.20

◆강배의 형태

강에서 운행하던 배는 바다에서 운행하던 배와 달리 그 기본 형태는 밑바닥이 평평하고, 폭이 짧고 길이가 길다. 이는 강이 바다와 달리 계절에 따라 수심 변화가 크고 물흐름이 빠른 여울을 자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고려시대 조운선에서 충주와 원주에 두었던 이러한 배를 바닥이 평평하다는 의미로 평저선이라 불렀다.

대표적인 강배에는 ‘운반선’이 있다. 이는 돛배는 돛을 이용해서 강 상류와 하류를 운행하는 배다. 이 배는 ‘늘배’라고도 불렸는데, 강에서 짐을 나르는 데 쓰던 돛단배를 말한다.

두 번째로 나룻배가 있다. 나룻배는 사람이나 짐을 태우고, 수로를 가로질러 반대쪽 강안으로 이동시키는 데 사용됐다.

뱃사공인 최모씨에 따르면, 인제 지역은 1990년대까지 내리천 또는 북천, 소양강 일원인 북한강 상류에서 나루터가 운영됐다. 나루는 강이나 내를 건너다니는 배가 다니던 곳이었다.

‘뗏목’도 있다. 남한강에 대해 설명한 한 제보자에 따르면, 뗏목과 떼배를 같이 사용했으나 북한강 제보자는 뗏목이라는 용어만 사용했다.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에 보면, 한강을 이용한 강원도 뗏목은 적어도 세종 이전부터 운행했다. 이는 강원도 백성들 생업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뗏목은 ‘벌채’ ‘운목’ ‘조립’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