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테레사 메이(Theresa May) 영국 총리가 16일(현지시간) 밤 하원에서 실시된 ‘정부 불신임안’ 표결에서 힘겹게 재신임에 성공했다. 영국 하원은 야당인 노동당이 제출한 정부 불신임안에 대한 표결 끝에 찬성 306표, 반대 325표가 나와 19표 차로 부결시켰다. 이로써 메이 총리는 기존의 내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신임을 얻게 됐지만 브렉시트(Brexit)를 앞둔 그의 앞길은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다.

영국은 2016년 6월 브렉시트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고 그 결과 근소한 51.9%의 찬성으로 브렉시트를 결정했다. 그 책임을 지고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가 물러나고 뒤를 이은 메이 총리는 이듬 해 3월 ‘EU 탈퇴’를 공식 통보하게 된다. 리스본 조약(제50조)에 따르면 EU 탈퇴는 통보한 날로부터 2년이 지나면 발효된다. 따라서 2019년 3월 29일 자정이 되면 영국은 EU 회원국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EU 탈퇴를 통보한 이후 지난 2년간 영국은 EU측과 지루하고도 소모적인 협상과 재협상을 반복해 왔다. 메이 내각이 그 총대를 멘 셈이다. 브렉시트가 영국과 EU의 ‘이혼’에 해당한다면 그동안의 협상은 ‘합의 이혼’을 위한 협상쯤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합의안을 놓고 영국 하원이 최종적인 비준동의를 하게 되면 모든 절차가 끝나게 된다.

리더십 부재와 영국정치의 비극

지난해 영국 의회는 브렉시트에 대한 의회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합의안에 대한 의회의 비준동의 이전에 먼저 하원의 동의를 얻도록 새로운 법률을 만들었다. EU와의 협상에 좀 더 힘을 실어주기 위한 의도가 다분했다. 지난 1월 15일 영국 하원이 부결시킨 것은 바로 그 ‘합의안’에 대한 표결 결과였다.

당시 영국 하원은 메리 정부의 합의안에 대해 찬성이 202표, 반대가 무려 432로 무려 230표 차이로 부결시킨 것이다. 집권 보수당에서도 무려 118명이나 반대에 동참했을 정도로 메이 총리의 완패였다. 영국 정부가 의회에 표결을 시도한 안건 가운데 200표 이상의 참패를 당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장 야당인 노동당이 메이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불신임안이 이번에 부결된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 하원이 ‘합의안’도 부결시키고 메이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도 부결시킨 그 배경을 어떻게 봐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그 속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브렉시트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생각보다 크다는 점이다. 지금의 영국은 몇 년 전 브렉시트를 외치던 그때보다 더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 들고 있다. 다수의 보수당 의원들까지 메이 총리의 합의안에 반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하지만 그 책임을 물어서 메이 총리를 물러나게 하는 것도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었다. 당장 브렉시트 발효가 두어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다시 총선을 하기도, 그렇다고 제2국민투표를 밀어붙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악화된 여론은 논외로 하더라도 물리적인 시간도 없다. 게다가 이런 문제로 정국이 더 혼란스럽게 되면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 될 수도 있다. 자칫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메이 총리가 말한 ‘플랜B’에 대한 기대감과 정국의 안정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악화된 여론과 무능하고도 대안 없는 정치권, 더욱이 리더십마저 실종돼버린 메이 정부의 위상은 그대로 ‘영국정치의 위기’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메이 총리를 붙잡아야 하는 그 딱한 상황은 야당인 노동당에게는 더 아픈 대목이다. 대안 없는 반대와 좌충우돌하는 이념의 기회주의적 속성은 노동당의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제 여론은 노동당의 목소리가 아니라 메이 총리의 ‘플랜B’에 시선을 더 집중시킬 것이다.

그동안 브렉시트에 강경한 목소리를 냈던 메이 총리는 자세를 낮추며 다시 EU와 협상에 들어갈 것이다. EU도 좀 더 적극적으로 메이 총리의 목소리에 화답하며 ‘브렉시트 철회’ 쪽으로 방향을 유도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메이 총리의 ‘플랜B’는 재협상과 제2의 국민투표 사이를 오가며 결국은 브렉시트 철회 쪽으로 결과를 이끌어 내지 않을까 싶다.

물론 EU도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고립주의’ 외교노선으로 국부를 일궈낸 영국이지만 그것은 옛날 얘기였으며 이제는 그런 고립주의 노선으로는 영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큰 목소리로 ‘브렉시트’를 외쳤지만 막상 그 시나리오가 현실화 될 즈음엔 너도나도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은 옛날의 그 영국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영국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영국은 참으로 아까운 2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그 사이 국론분열과 소모적인 정쟁의 기회비용은 계산조차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에 국민은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다. 어쩌면 애초 격에 맞지 않은 깃발을 든 캐머런 정부의 오만과 무능이 화를 자초한 셈이다. 그럼에도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거대 이슈에 야당인 노동당마저 적절한 대안이 되질 못했다. 의회민주주의의 역사요, 교과서로 불렸던 영국정치도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토리와 휘그의 오랜 전통도 이제는 말 그대로 전통으로만 남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정치의 무능은 곧 국민의 고통과 함께 간다는 사실을 최근 영국의 의회정치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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