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예송(禮訟)은 궁중 전례에 대한 싸움이다. 멸문지화를 각오하고 서인 남인이 싸웠다. 조선 18대 현종 왕 때의 일이다. 왕가에서 초상이 났을 때 복상(服喪) 기간이 얼마여야 하느냐를 가지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 현종 재위 15년 동안(1659-1674) 두 차례 예송 싸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진으로 재위 내내 국론은 분열되고 국정은 차질을 빚었다. 백성들은 이 시기에 가뭄과 홍수 재해와 역병으로 숱하게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그 시체를 치우느라 지방 관아의 정상적인 공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소모적 당쟁과 내홍(內訌)에 빠져 있을 때 우리 주변국들은 유럽과 해상 무역을 활발하게 벌였다. 이를 통해 국부를 쌓기에 바빴다.

일본 나가사키(長崎)에는 네덜란드의 상관(商館)이 설치돼 있을 정도였다. ‘하멜 표류기’를 쓴 하멜 등 네덜란드의 무역선 선원들이 제주도에 표류해 왔다가 탈출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들은 기착지 대만에서 교역국 일본을 향해 가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해 왔었다.

바깥 사정은 모른 채 당쟁에 골몰하는 조선 땅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현종은 대신들의 예송을 참다못해 ‘백성이 굶어 죽어간다는 말에 슬프고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살고 싶지가 않다. 빨리 죽고 싶다’며 자제를 촉구해도 봤지만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조선의 5백 년 사직(社稷)이 기울어 가는 것도 모르고-.

1차 예송(己亥禮訟)은 1659년 현종이 19살로 임금이 된 해에 벌어졌다. 북벌(北伐)의 야심을 못 이루고 죽은 선왕 효종의 복상 기간이 쟁점으로 등장했다. 효종은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절치부심 북벌의 야심을 불태우다 죽었다. 성리학 예법에 따르면 적장자가 죽었을 때는 그 부모가 3년, 차자 이하는 1년 동안 상복을 입게 돼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생존해 있는 효종의 계모이자 효종의 아버지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대비/趙대비)는 몇 년을 복상해야 하느냐가 쟁점이었다.

성리학의 예법으로만 따진다면 효종은 차남이므로 1년이면 된다. 그런데 ‘왕가가 사가(私家)와 같을 수 없지 않느냐. 차남도 왕이 되면 적통 장남과 같은 것이지 무슨 소리냐. 그러니 3년을 복상하는 것이 맞다’는 반대 의견이 제시됐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쓴 윤선도(尹善道)와 윤휴 허목 등 남인(南人) 대신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학자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은 ‘왕가의 의례라도 종법(宗法)의 원칙을 벗어나면 안 된다. 1년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이 싸움은 장자, 차자 구분 없이 1년 상을 규정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범에 따라 1년 상을 하는 것으로 절충해 봉합됐다. 실질적으로는 현종이 서인(西人)의 손을 들어준 셈인데 이로써 서인의 시대가 열리고 남인은 몰락했다. 남인 측 대신들은 변방으로 귀양을 가거나 유배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봉합의 실밥은 기어이 다시 터지고 만다. 그것이 1674년 1월에 벌어진 2차 예송(甲寅禮訟)이다.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善왕후)가 죽었는데 역시 인선왕후의 시어머니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몇 년 상을 입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효종을 장자로 보면 1년(朞年服 기년복)이고 차자로 보면 9개월(大功服 대공복)인데 예조(禮曹)에서는 9개월로 올렸다.

현종은 이를 보고 몹시 언짢아하고 화를 터뜨렸다. ‘복상 기간을 9개월로 정한 것은 선왕(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 왜 이리 왕가의 일에 인색한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판정을 내렸다. 이로써 궁중에는 또 한 번 격동의 폭풍우가 몰아쳤다. 그동안 권력을 잡고 있던 송시열 등의 서인 세력은 숙청되고 권력은 남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남인들은 송시열은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치열한 논란을 벌였으나 살려두었다. 대신 궁중에서 축출해 초야에 묻히게 했다.

2차 예송의 홍역을 치른 그해 8월에는 현종이 죽고 숙종이 등극한다. 또 예송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부왕(父王) 재위 동안 예송의 당파 싸움을 지긋지긋하게 겪어온 숙종은 엄명을 내려 예송을 차단했다. 그렇다고 대신들의 싸움이 멎은 것은 아니다. 예송을 못 하게 하자 다른 일을 가지고 궁중을 피로 물들인 당파싸움을 계속했다.

그때마다 숙종은 환국(換局)의 카드를 빼들었다. 그 횟수가 재위 46년 동안(1674-1720) 무려 10여 차례다. 이 과정에서 파당의 권력이 뒤바뀌며 숱한 대신들과 인재들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죽어나갔다. 숙종이 세자로 있을 때의 스승이었던 송시열도 이때 사사(賜死)되기에 이른다.

서인 송시열은 남인 세력이던 소의(昭儀) 장옥정이 낳은 아들 윤(昀, 20대 경종)을 원자로 책봉한 것에 반대해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진노를 사 죽임을 당한다. 장옥정은 원자 책봉이 이루어질 때 소의에서 희빈(禧嬪)으로 봉해졌다.

이것이 1689년 숙종 15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기사환국 후에는 인현왕후가 폐출 되고 장희빈은 중전으로, 원자 윤은 세자로 책봉된다. 인현왕후와 장 씨의 운명이 뒤바뀌며 궁중을 피로 물들이는 참혹한 역사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왜 이래야만 했는가. 민생은 피폐하고 백성은 굶어서도 죽고 역병으로도 죽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 슬픈 역사가 우리에게 준엄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헛된 다툼이 얼마나 많은가. 예컨대 왜 다 결말이 난 천안함 시비는 계속되는 것이며 공사가 한창인 4대강 사업,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은 붙들고 늘어지는 것인가. 떠난 열차에 돌팔매질을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아직도 예송인가. 이래 가지고서야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과연 미래가 있는 것인가. 역사를 보고도 배우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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