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김성완 기자] 3.1운동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박남수 상임대표가 7일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본지와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1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3.1운동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박남수 상임대표가 7일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본지와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1.11

3.1운동사업, 시민주도해야

3.1운동 조직 중심은 천도교

개신교, 3.1운동 세계에 알려

기미독립선언서, 민족대표 꿈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박남수 상임대표 인터뷰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3.1운동은 최초로 이 나라에 시민을 탄생시켰다. 고종의 제국을 최초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국을 만들어놓은 정신이 3.1 정신이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관련 단체가 분주하다. 아울러 정부 차원의 기념사업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전 국민이 참여하는 아리랑 전야제를 비롯해 3월 1일에 열리는 축제 형식의 기념식, 민주·인권·평화 박람회 개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등 다채로운 행사와 기념시설 건립을 준비 중에 있다.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상임대표이자 천도교 박남수 전직 교령은 8일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히면서 “3.1운동은 시민 정신의 표출”이라며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은 시민이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기념사업이 정부 주도도 행해지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박 대표의 시각이 반영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올해 천도교를 중심으로 종교계,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시민 주도의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친다.

3월 1일 당일에는 범종교·시민단체와 함께 3.1운동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고, 3.1운동 100주년 시민선언문도 발표할 계획이다.

이 밖에 3.1운동의 의의를 조명하는 종단별 학술대회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진전 등을 준비하고 있다.

박 대표는 3.1운동의 위대한 정신의 맥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고 봤다.

그는 3.1운동의 3대 정신은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이라고 설명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3.1운동을 시발점으로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항쟁, 최근에는 2016년 광화문 촛불까지 그 정신이 이어져 왔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광화문 촛불 시위를 예를 들었다.

박 대표는 “우선 진보·보수를 떠나 당시에는 누구나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이게 일원화다. 그리고 모두가 다 함께 참여하는 대중화가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절대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비폭력이 세 번째”라며 “이렇게 본다면 광화문 촛불은 3.1정신의 연장선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스스로 광화문 촛불시위를 3.1정신이 이어져 온 모습으로 자랑하면서, 왜 3.1운동 기념사업을 시민에게 돌려주지 않고 관이 주도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비판했다.

3.1운동 전개 과정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박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3.1운동 조직의 기본은 천도교다. 동학혁명 경험이 있는 종단이었고 천도교 인구가 300만에 달했다. 당시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책임자들이 3.1운동에 참여했다. 그때 개신교 인구는 15만에서 20만 정도로 조직력을 갖출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모든 자금이 천도교에서 나왔다. 개신교도 천도교 돈으로 3.1운동을 했다. 뿐만 아니라 천도교는 1910년부터 지도자를 양성해 왔기 때문에 3.1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천도교는 천도교라는 하나의 종단만으로는 민족운동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당시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 다수가 이미 해외로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그래서 개신교 측 남광 이승훈에게 독립운동을 함께하자고 요청했다. 불교의 경우는 당시 만해 한용운 스님만으로는 대표성이 약해 남원에 있는 불교계 큰 어른인 백용성 스님을 합류시켰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이어 “3.1운동이 민족운동이 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백용성 스님이라고 본다”면서 “백용성 스님이 서명을 하지 않았으면 민족운동이 안 될 수도 있었다”고 진단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개신교 숫자가 많은 이유에 대해서 박 대표는 “개신교는 그때부터 분파적인 작동을 많이 한 종단”이라고 지적하면서 “장로교는 장로교대로, 감리교는 감리교대로 대표로 참여하려고 해서 양측이 서로 통합이 안됐다”고 에둘러 설명했다.

다만 “개신교는 세계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다”며 “이들에게는 선교사들이 있어 3,1운동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고 개신교의 역할이 있었음을 전했다.

최남선이 작성했다고 알려진 기미독립선언서 관련해서도 박 대표는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육당 최남선이 썼다고 알고 있다”며 “하지만 아니다. 독립선언서는 당시 민족지도자들의 생각과 사상을 문장가인 최남선으로 하여금 문장을 만들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덧붙여 그는 최근 KBS 프로그램 역사저널에서 한 교수가 발언한 내용을 인용해 독립선언서는 민족지도자들이 꿈꾸는 모든 내용을 최남선이 정리해 작성한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특히 반만년의 우리 민족의 정신들이 샛강으로 이러저런 모양으로 흘러오다가 3.1운동이라는 큰 강을 만드는 시기에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다고 봤다.

박 대표는 또 “독립선언서 주된 내용은 일본을 탓하고 공격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미래에 살아가야할 지혜가 담겨있다”면서 “상생·평화·공존 등 모든 사고가 들어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놀라운 것은 그들 스스로도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어렵게 살아가는데 인류평화를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어떻게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인류평화라는 말을 쓸 수 있느냐”고 강하게 말했다.

박 대표는 계속해서 “독립선언서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를 향해 있다”며 “오늘날에 이르러서 진짜 평화라고 한다면 우리의 평화만을 얘기할 수는 없다. 아시아의 평화, 나아가서는 전 인류의 평화가 와야 우리 국민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천도교는 올해 창도(創道) 160주년을 맞았다.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표방하고 있다. 최제우, 최시형에 이은 3세 교조인 손병희(1861~1922)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교세를 키웠으며, 민족대표 33인으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주도하는 등 3·1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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