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와 함영훈 작가가 함께 떠나는 스포츠 in 열정 ①]
선수시절부터 지도자까지 그의 축구인생을 듣다

▲ 광저우아시안게임 출정에 앞서 파주NFC에서 홍명보 감독을 만나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까지 그의 축구인생을 들어봤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월드컵 4회 출전, 아시아인 최초로 월드컵 개인상 브론즈볼 수상, 한국선수로는 가장 많은 A매치 135경기(9골)를 국가대표로 활약한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41). 선수로 화려한 시절을 보낸 홍명보 감독은 이제는 지도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펼쳐나가고 있다.

지난해 U-20 이집트월드컵에서 18년 만에 한국을 8강으로 이끈 데 이어 이번에는 광저우아시안게임 감독을 맡아 24년 만의 금메달 획득이란 지상과제를 안고 도전에 나섰다.

출정하기 전 함영훈 작가와 함께 파주NFC(축구트레이닝센터)에 방문해 홍명보 감독을 만나 그의 축구인생을 들어봤다. 스포츠 스타를 모델로 캔버스에 담아 작품을 만드는 함영훈 작가의 두 번째 작품전인 ‘스포츠로 이야기하다-열정전 미술전시회’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으로 홍명보 감독이 선정돼 이같이 만남을 갖게 된 것. 열정전은 함영훈 작가가 장애 체육인을 응원하기 위해 전시 수익금 모두를 대한장애인체육회에 기부하고자 기획된 전시회다. 

아시안게임 축구에 국민들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어 부담도 가질 법한데, 오히려 그는 에너지가 넘쳐 보이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어린 선수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나이보다 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비결이라고 한다. 홍 감독은 “기대하고 있으신 만큼 기대에 부응하도록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짧은 인사말을 던졌다.

역시 잘 웃지 않기로 소문난 홍 감독이었지만, 그래도 인터뷰 내내 많이 웃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돋보이기도 했다.

◆ 키 작은 소년 홍명보, 축구 시작의 계기는

▲ ⓒ천지일보(뉴스천지)
잘 알려진 대로 홍 감독은 서울 광장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홍 감독이 축구선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무엇보다 친구의 영향이 컸다.

여느 아이들처럼 방과 후나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축구를 즐겼던 홍 감독은 4학년 때 축구부가 만들어졌지만, 부모의 반대로 못 들어갔다. 하지만 친구들은 축구부에 다 들어갔기 때문에 자신은 늘 혼자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이것이 마치 친구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상처가 됐다고 한다.

그렇게 1년 동안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자신도 본격적으로 정말 축구를 하고 싶어 부모님을 설득해서 축구선수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축구를 하게 된 이유는 딱 한 가지, 친구들하고 같이 하는 게 좋아서 시작하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도 뜻밖에도 소년 홍명보는 키가 아주 작고 몸이 약한 아이였다. “중학교 졸업 전까지 키가 작은 것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굉장한 콤플렉스였다”며 “따라서 내가 실질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조건이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서 지켜보던 부모님도 마음이 안 좋으셨을 것”이라 회상했다. 부모의 걱정에도 불구 축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고 더 운동을 많이 한 것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던 것.

특히 중학교 시절 축구부의 임흥세 감독이 물도 못 마시게 하면서 호되게 훈련시킨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는 홍 감독은 “당시에는 물을 먹으면 잘 뛰지 못한다는 이론적인 게 있어서 정말 더운 여름에도 갈증이 많이 났는데도 물을 못 먹게 했다”면서 “지금은 반대로 나는 틈만 나면 선수들에게 물을 많이 마시라고 권장하고 있다”고 말하며 살짝 웃었다.

◆ 키가 크면서 실력도 쭉~ 축구스타로 발돋움

키가 작아 고민 많았던 소년 홍명보는 동북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키가 부쩍 자라면서 축구 실력도 함께 늘어난다. 홍 감독은 키가 작은 문제를 해결해야 축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우유에다 밥을 말아 먹을 정도로 우유를 많이 먹으며 개인적으로 노력을 많이 했다고 말하면서도 “내 노력보다는 신체적인 발육이 좀 늦지 않았나 싶다”며 농담도 던지는 여유를 보였다.

당시 운동부라고 하면 위험스럽거나 거칠다는 안 좋은 이미지가 있어 일반 학생들보다 더 일반학생처럼 보이려고 얌전하게 행동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홍 감독에게 이성에 관한 관심도를 묻자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항상 운동이 늦게 끝나면 집에 바로 가고 하는 생활의 반복으로 한 번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축구 밖에 모르는 학생이었다.

그 노력의 결실로 홍 감독은 고등학교 2, 3학년 때 연거푸 전국대회에서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우승으로 이끌었다.

◆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대학시절 스위퍼로의 전환

▲ ⓒ천지일보(뉴스천지)
고려대에 진학한 홍 감독은 3학년 때 감독의 권유로 수비수인 스위퍼(리베로)로 전환하게 된다. “감독님이 한 번 해보라고 했는데 썩 내키지 않았는데, 시키니깐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며 이것이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축구의 좋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내가 포지션을 바꾸지 않았다면 영광스러운 국가대표 생활도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며 수비로 바꾸길 정말 잘했다며 다행스러워했다.

홍 감독은 “수비수는 화려하진 않지만 팀에서 아주 중요하다”며 “나는 미드필더를 경험해 본 상황에서 수비수를 해서인지 볼배급이나 공격본능이 합쳐져서 좋은 수비수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홍 감독이 대학 시절 큰 관심사는 뭐니 뭐니 해도 연고전이었다. 1, 2학년 때는 졌는데 3학년 땐 이겼고, 4학년 때는 국가대표로 남북통일축구 경기에 참여해 출전하진 못했지만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가 이겨 기뻤다고 한다.

◆ 국가대표로 활약, 아시아 최고 리베로가 되다

대학교 4학년 올라가는 겨울 시점 처음 국가대표가 됐다는 홍 감독은 당시 처음 연락이 왔을 때는 믿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도 많았다고 한다.

국가대표로 발탁되고 21살의 나이에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 참가하게 된 홍 감독은 “나는 나가서 경기에 뛰어야겠다는 생각을 안했다. 그냥 월드컵을 현장에서 보는 경험 자체가 기뻤는데 운이 좋게 경기에도 나가 즐거웠다”고 첫 월드컵 출전의 느낌을 회상했다.

두 번째 월드컵인 1994년 미국대회에서 홍 감독은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월드스타로 거듭나게 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나는 수비수이기 때문에 골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 했다”며 “우연찮게 골을 넣게 되어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꾸준히 국가대표로 무려 135경기에 출전하며 ‘상대공격의 맥을 읽고 차단해내는 판단력과 지능적인 플레이가 있는 선수’라는 극찬을 받는 등 꾸준한 활약으로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 ‘영원한 리베로’란 별명을 얻게 된다.

홍 감독은 “A매치 135경기 한국인 출전 신기록은 반드시 깨져야 한국축구가 발전하는 것”이라 말하면서도 “예전보다 A매치 경기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라며 쉽게 깨지진 않을 것이란 의미를 담은 듯 말을 흐려 웃음을 줬다.

▲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홍명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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