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열(1954~  )

 

초식의 질긴 기억이 스멀스멀 몸으로 스며들 때가 있다
날카로운 발톱도 치명의 송곳니도 갖지 못한
쫓기는 자의 슬픔
그 슬픔을 용서하지 못할 때
불끈 뿔은 솟구쳐 오른다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숨과
눈물로 범벅이 된 분노는
높은 굴뚝을 타고 오르는 연기가 되거나
못으로 온몸에 박히는 뿔이 된다.

나도 뿔났다.

 

[시평]

‘뿔’을 가진 동물들은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을 지니지 못함이 일반이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치명적인 이빨이 없는 대신에 머리 위에 뿔을 지니고, 이 뿔로 위험으로부터 최선의 방어를 하거나, 뿔이 지닌 위엄(?)을 뽐내며, 공격을 모면하고자 노력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동물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뿔’은 육식동물이 아닌, 초식동물들의 한 특징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한 생애를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초식의 질긴 기억이 스멀스멀 몸으로 스며들 때가 있다. 그래서 날카로운 발톱도 치명의 송곳니도 갖지 못한, 쫓기는 자의 슬픔을 지니며 살아갈 때가 허다하다. 쫓기는 자의 슬픔. 쫓기고 쫓기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쫓기는 슬픔,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불끈 솟구쳐 오르는 뿔.

아마도 초식동물의 ‘뿔’은 이렇게 해서 그 머리에 솟아 오른지도 모른다. 쫓기는 자의 슬픔으로 인하여,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른,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쩌면 그 뿔은 ‘슬픔’의 또 다른 표현이고 모습이 아니겠는가.

오늘도 저 드넓은 세상의 평원에는 자신의 어쩌지 못하는 슬픔의 뿔을 머리에 인 채, 우리들 평화롭게, 아니 평화를 기대하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온몸으로 경계하며, 우리들 모두 한가로운 평화를 위장한 채, 머리 위로는 잔뜩 위엄 아닌 위엄의 뿔 드러내 보이며, 오늘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이리라.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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