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조선독립신문’ 이야기
[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조선독립신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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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조선독립신문 1919. 8. 15 ⓒ천지일보 2019.1.4
조선독립신문 1919. 8. 15 ⓒ천지일보 2019.1.4

언론은 대중소통의 중요 수단이다. 국가의 주권이 침해당하고 국가의 기능이 위축된 상황에서 언론은 국권회복운동에 대중의 관심과 참여를 불러일으키는 데 더욱 중요하다.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는 한말 애국계몽과 국권회복운동에 그러한 역할을 했었다. 1910년 일제가 강제병합을 한 이후 조선총독부 어용신문 ’매일신보‘ 외에 한국인의 모든 신문‧잡지는 폐간되었다. 깜깜한 암흑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TV는 물론 라디오 방송도 없었던 3.1운동의 시간 중에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지하신문, 격문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일체의 보도가 통제된 가운데 국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여 만세시위를 격려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 3월 초부터 8월까지 총 76종의 유인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1회적인 ‘경고문’ 또는 ‘격문’이 있는가 하면, ‘조선독립신문(3월~8월)’, ‘국민신보(4월 중순~8월 하순)’ ‘자유민보’ 및 ‘혁신공보(4월~10월)’와 같이 수개월에 걸쳐 비밀리에 발간된 지하신문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빨리 나왔고 대표적인 것이 ‘조선독립신문’이었다. 손바닥만 한 전단으로 나온 제1호는 2월 28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천도교 소유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와 함께 배포하기 위해 1만매를 인쇄하였다. 시위운동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조선독립신문 제1호 ⓒ천지일보 2019.1.4
조선독립신문 제1호 ⓒ천지일보 2019.1.4

‘조선독립신문’ 제1호는 “①손병희 등 33인의 민족대표가 3월 1일 태화관에서 조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종로경찰서에 붙잡혀갔다 ②최후의 일인까지 난폭한 행동을 자제하라. ③이날 민족대표의 구인과 동시에 전 국민이 민족대표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일제히 호응하라”는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며 평화적 시위로써 전 국민이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이 시중에 배포되자 그날 오후 6시 윤익선이 체포되었다. 발행의 실질 책임자인 이종린은 피신하여 경성서적조합 서기인 장종건(張悰鍵, 25세)에게 등사판으로 계속 이어가도록 부탁했다. 3월 2일부터 7일까지 이종린이 ‘제2호~4호’ 원고를 작성하여 주었다. 장종건은 경성전수학교 2학년생인 임승옥(林承玉, 26세), 김영조(21세)의 도움을 받으며 종로서적조합 사무실에서 제2호 5, 6백매를 등사판으로 인쇄, 배포했다. 3호와 4호는 장종건 혼자 인쇄, 배포하였다.

‘제2호’의 내용은 민족대표의 체포 소식과 탑골공원 만세시위 시작 소식과 함께 다음과 같이 고종의 독살설과 임시정부 조직 소식을 전했다.

“이태왕(고종)의 죽음은 이완용 등 측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한일합병은 자진하여 이를 하였다’는 뜻의 문서를 보내도록 그의 조인을 요구하여 이를 협박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독살하였다. 시위운동 당일 황금정 입구를 경계로 하고 있던 우리 헌병은 탈모하고 만세를 불렀다. 근일 중에 가정부를 조직하고 가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다.”장종건은 계속하여 3호와 4호를 5, 6백매씩 인쇄하여 임준식에게 주어 배포하게 했다. ‘제3호’의 내용은 3월 6일 조선독립대회 참여를 촉구하면서 유림들의 궐기를 촉구하며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있는 내용이다.

“13도 각 대표자를 선정하여 3월 6일 오전 11시 경성 종로에서 조선독립대회를 개최하니 신성한 우리 형제자매는 일제히 내회하라. 근일 유림 중에서 큰 덕과 중망이 있는 노대가 제씨는 대대적인 활동을 개시하라(하략).”
 

경성서적조합 사무소 터-조선독립신문 인쇄지(현재 관훈동 155번지) ⓒ천지일보 2019.1.4
경성서적조합 사무소 터-조선독립신문 인쇄지(현재 관훈동 155번지) ⓒ천지일보 2019.1.4

3월 10일 이종린 또한 일경에 붙잡혀 갔다. 장종건은 3월 13일 ‘제5호’ 700매를, 3월 15~16일경 장종건은 파리 평화회의 대표의 활동상과 조선민족의 독립 쟁취의 당위성을 주장한 ‘제6호’를 900매 가량 인쇄, 배포하였다.

“조선민족 대표자는 빠리에 도착하여 무사히 원만한 독립운동을 행함에 대하여 외국인이 칭찬하는 치사는 이번 독립운동이 유력함을 공인하는 것으로서 일본에게 낙심하게 만들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은 영·미 각국이 공인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을 점령한 일은 조선인 전체에 대한 전승한 결과가 아니고 국적의 손에서 횡령한 것이다. 조선은 즉 조선민족의 조선이므로 조선을 조선민족이 자유독립 시킴은 민족자결주의에 의하여 정당한 것.”

여기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타났다. 즉 민족자결, 즉 독립은 열강의 원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민족의 조선이므로 조선민족이 스스로 독립을 쟁취함은 정당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어 장종건은 동부 견지동 주막 이인영의 집에서 ‘제7호’ 원고를 작성하여 최기성에게 주어 수백 매 등사하여 발간, 배포하였다.

‘조선독립신문’ 발행이 계속되자 일본 경찰은 감시와 경계를 강화했다. 장종건은 거처를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로 옮겼다. 3월 22일, 24일 제8호 원고를 작성하여 600매, 9호 및 부록을 2000매를 인쇄, 배포하였다. 3월 23일의 ‘제8호’ 내용 중에는 “3월 21일 밤 우미관 및 단성사에서 활동사진의 영사 중 관람객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내용도 있었다.

3월 24일 ‘제9호’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 등 해외의 독립만세 시위 소식도 실렸다. ‘제9호의 부록’에는 독립운동의 이유를 재천명하는 내용이 실렸다.

“우리들은 정신상 언론·출판 신앙의 3대 자유를 박탈당하고 정의 인도와 민족자결의 천명 밑에 서서 독립을 선언한 청년 남녀를 포살당하였다. 우리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한 이래 용감하게 죽은 몇 천의 동포와 옥중에서 형을 받으며 신음하는 몇 만의 동포는 누구를 위하여서인가? 우리 동포를 위해서다. 정의 인도와 민족자결의 천명을 받은 평화세계에 오직 홀로 우리 동포만이 박멸을 당하여 고통을 받음은 통분하기 그지없다. 마른 나무나 불타버린 재가 아닌 민족, 장속의 새나 솥 속의 물고기가 아닌 동포는 전체 생령의 박살을 앉아서 감수할 것인가. 아니다! 조국을 위하야 선진을 위로하고 후생을 교도하여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결사의 각오로써 주저하지 말고 맹진 노력하여 필생(必生)의 관문에 도착하라.”

이러한 비밀 발간물을 간행하는 일에는 등사판을 구하는 것부터 위험이 따랐다. 지금의 한국은행 근처에 굴정등사판(堀井謄寫版) 전문점이 있었는데, 한국 사람이 등사판을 사러 오면 팔아먹은 다음에 꼭 경찰에 밀고했다. 이 때문에 붙잡힌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둘째는 등사 장소가 문제였다. 한군데에서 오래 발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이러한 지하신문의 뉴스원은 상해에서 비밀리에 들어오는 ‘독립신문’이나 아니면, 해외에서 여러 방법으로 들어오는 정보였다. 예를 들면 이렇다.

“만주 등지에서 발행(發行)되는 <일문신문(日文新聞)> 같은 것에 화학약품(藥品) 액으로 글씨를 써서 이것을 보내오면, 우리는 받아서 이 신문(新聞)을 화롯불에 쬐면 글씨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보성중 및 보성전문학교 정문에서 보는 학교와 오른쪽 고목 옆 기와지붕 위로 보이는 것이 인쇄소 보성사 ⓒ천지일보 2019.1.4
보성중 및 보성전문학교 정문에서 보는 학교와 오른쪽 고목 옆 기와지붕 위로 보이는 것이 인쇄소 보성사 ⓒ천지일보 2019.1.4

신문의 배포는 밤에 몇 사람이 나누어 구역을 정하여 배달하였다. 이희승의 경우 다동, 당주동, 적선동 등지로 돌아다니며 집을 보아서 또는 행인의 눈을 피해 대문 틈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이렇게 배포하다가 들킨 사람이 또한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시내에서 이러한 신문을 제작하는 그룹은 수십 개나 되었으며 발각되어 잡힌 사람도 많았다.

장종건은 ‘제9호 및 부록’을 발간하고는 체포되었다. 3월 하순부터 ‘조선독립신문’의 발간은 보성고보 4학년 장채극(張彩極), 3학년 이철(李鐵), 1학년 한창식, 김홍식, 세브란스 의전 이철(李鐵) 등이 이어받았다. 이들은 “시내에 하등 통일성 없이 간행되고 있는 ‘독립신문’ 기타를 통일하여 간행하기 위하여” 원고, 원고의 전달, 인쇄배포 등의 임무를 분담했다. 4월 초부터 제17호를 시작으로 하여 매일 또는 격일 또는 4, 5일 만에 한 번씩 인쇄, 발행하여 23호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함경북도 경성군 주북면 출신으로 귀향해 있던 보등고보 4년생 전옥결(全玉)이 상경하여 합류했다. 이들은 인쇄 발행 담당자로서 김홍식 외 각 중등학교 대표자인 경신학교 강우열(康禹烈), 중앙학교 최석인(崔錫仁), 배재고보 김병호(金炳鎬)를 인쇄, 배포에 참여 시켰다. 그리하여 4월 26일까지 24~27호까지의 원고를 조민언에게서 받아 가지고 인쇄 담당자에게 교부, 인쇄하여 시내 각 곳에 배포하였다.

또한 이들 장채극, 전옥결, 이철은 4월 중순부터 김사국, 김유인의 권유를 받아 국민대회의 실행 방면의 담당을 맡아 4월 17, 8일경 ‘임시정부 선포문’ ‘임시정부령 제1호 제2호’를 번각 1500매를 인쇄하여 시내에 배포했다.

이렇게 발행주체들이 릴레이로 이어가며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이 언제까지 발간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8월 29일 ‘국치기념호’까지 확인된다. ‘조선독립시눈’은 언론이 통제된 암흑시대에 자유와 독립의 빛을 주는 언론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것이 더 의미 있는 것은 계속되는 체포와 구속 속에서 자발적인 청년학생들에 의해 이어져 6개월이나 이어져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 언론사는 물론 정신사에 기록되어야 할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이후 ‘국민회보(國民會報)’, ‘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 ‘자유민보(自由民報)’, ‘국민신보(國民新報)’, ‘국민신문’ 등 수십 종의 지하신문, 격문류들이 나와 독립운동을 촉구, 확산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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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쓰 2019-01-12 23:39:37
자유와 독립의 빛이 되어주는 역할과 구속과 체포속에서도 자발적인 청년학생들에 의해 이어져 갔다는 점은 분명 의미있고 본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성희 2019-01-07 16:51:27
억울한일당하지않는
평등한사회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수아 2019-01-07 15:42:54
이런일은 다알려야지요.감사합니다

권희연 2019-01-07 15:03:08
좋은기사 감사합니다 이런일이 있었는지 몰랐네요

로라 2019-01-07 14:18:10
다시금 되새기게되네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