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명의 성조 영락(永樂) 연간에 중앙정부는 도독 마엽(馬燁)을 귀주(貴州)로 파견했다. 그는 백성들을 포악하게 다루었다. 견디다 못한 현지 소수민족들은 무력항거를 준비했다. 그러나 마엽의 폭정은 명이 제정한 토착민 관리정책인 ‘개토귀류’를 강력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협화음에 불과했다. 저항의 중심에는 이족(彛族)의 여성지도자 사향박의라달(奢香剝衣裸撻)이 있었다. 사향은 사람들의 분노를 진정시켰다.

“마엽은 우리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력으로 항거하면 그것을 구실로 군대를 동원해 한족관리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것입니다.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향은 북경으로 성조를 찾아갔다. 사향은 정중하게 예를 올린 후 마엽의 폭정과 부정을 고발했다. 성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정하는 척하다가 불쑥 물었다.

“마엽은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에게 어떻게 보답할 것이냐?”

사향은 자손대대로 작란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성조는 웃으며 본분을 지키는 당연한 것이 무슨 보답이냐고 말했다. 사향은 귀주의 동북쪽에는 파촉(巴蜀)으로 통하는 작은 길을 확장해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제안했다. 마엽을 공개처형한 성조가 말했다.

“마엽은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귀주의 안정은 없었다.”

성조는 변경안정을 대국적인 문제로 판단했다. 그는 마엽의 충심을 인정했지만, 작은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향을 만난 그는 현지 사정이 다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그의 머리에서 냉정한 계산기가 작동했다. 한 명을 희생하고 귀주의 안정과 오지인 귀주에서 사천으로 통하는 길을 소통하면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도로개통이라는 아이디어는 사향이 성제를 만나기 전에 미리 누군가가 알려주었을 것이다. 사향은 성조의 냉담한 태도에 질려 스스로 그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몽고를 몰아내고 정권을 수립한 명은 북방의 강자와 충돌하는 것보다 서남방의 경략에 집중했다. 따라서 서남방에 산개한 소수민족의 정권을 세우는 것을 중시해 어떻게든 중앙정부에서 통제하기에 유리한 기구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태조가 설치한 운남 포정사와 성조가 설치한 귀주 포정사는 중앙정부가 변방을 관리하기 위한 정식 통치기구였다. 귀주가 평정된 후 중앙정부는 해당 지역의 소수민족 우두머리인 ‘토사’에게 지역의 관리를 맡겼다. 중앙정부는 그 지역의 구체적 사무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토사는 정기적으로 중앙정부에 진공했다. 토사의 지위는 세습됐으나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토사제도는 원에서 시작됐으며, 명에서 강화됐다. 명은 비토착민 출신을 토사로 임명했다. 이것이 개토귀류이다. 기존의 이익에 위배된다고 생각한 소수민족의 지도층이 곳곳에서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엽은 성급하게 실적을 올리려고 사향에게 모욕을 주어 반란을 유도했다가 무력진압을 기도했다. 그러나 사향은 마엽과의 충돌보다 성조와의 담판을 선택했다. 쿠데타로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를 정도로 냉혹하고 과감한 성조는 마엽의 목숨과 지방정권의 안정이라는 두 가지를 저울질했다. 결국 그는 마엽의 머리와 귀주의 안정을 교환하고 촉으로 통하는 산길개통이라는 보너스까지 챙겼다. 이 길이 개통되자 중앙정부의 서남지역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됐다. 국가로서야 이익이었지만, 충성을 다하다가 죽은 마엽은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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