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丁若鏞)의 강력한 후원자라 할 수 있었던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昇遐)는 사암(俟菴)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는데 그렇다면 정조는 무슨 이유로 승하하게 된 것인지 그 경위를 자세히 소개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1800년(정조 24) 5월 30일 정조는 경연(經筵)에서 중요한 하교(下敎)를 내렸는데 오회연교(五晦筵敎)라고 불리는 이 경연에서 정조는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사실로 인정해라. 그렇게 한다면 내 아버지 사도세자를 궁지에 몰아 넣은 세력을 처벌하지는 않겠다. 그러니까 경들이(노론벽파) 먼저 잘못을 시인하고 고개 숙인다면 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겠다.”

이는 노론벽파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정조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의 정국은 정조가 친위세력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느냐 아니면 노론이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의 기로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6월 13일 정조의 등에 난 종기(腫氣)가 악화해 의관(醫官)들이 처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했으며, 결국 보름이 지난 6월 28일 조선의 르네상스를 구현하고자 했던 정조가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긴 채 승하하고 말았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는데 정조가 의원들의 진료에도 병세가 악화되자 정순왕후가 직접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올리라고 지시했다는 것인데 정순왕후는 영조가 건강이 안 좋았을 때 이 약재를 복용한 이후 효험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에 비추어서 성향정기산을 권유했다.

그런데 이 약재로도 특별한 효험이 없자 이번에는 정순왕후가 직접 성향정기산을 들고 정조의 처소인 영춘헌(迎春軒)에 들어갔으며, 그 이후 정조가 승하했다는 것인데 정조와 정순왕후 이외에 그 누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의 예법(禮法)은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임금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정순왕후가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이 정조실록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 해당 내용을 인용한다.

“이날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에 상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 이다’하였는데 얼마 안 돼 대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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