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연 한국트리즈경영아카데미 원장

요사이는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 1인 미디어 등이 기존 미디어 시장의 지형을 바꾸는 미디어 빅뱅의 시대이다.

현재 약 400만 명 수준인 스마트폰 가입자는 올 연말에는 6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는 스마트폰 덕분에 온라인 교육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을 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의 잠재력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 강연, 세미나, 특강이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주제로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다. 주로 컴퓨터로 이용하던 어린이용 교육 콘텐츠, 외국어, 독서, 수능 동영상 강의 등 여러 가지 교육용 애플리케이션이 개발되어 스마트폰으로 옮겨지면서 온라인 교육시장이 매우 커지고 있다.

블루오션을 위한 이동통신사와 교육업체들의 움직임이 매우 빠르듯이 사람들의 만남의 기회나 정보 교환도 광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많은 것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상황에서 사람, 정보, 공정성 등의 옥석을 가리는 일은 아주 필요한 스킬이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고 법정스님이 말했듯이 공간과 여백의 미를 추구하는 철학이 필요하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정의가 흘러 넘치고 있다.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29세에《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람이 있다.

“만약 탈세로 처벌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세금을 내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는 마이클 샌델 하버드 대학 교수가 그다. 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2010년 8.15 경축사에서 대통령의 ‘공정사회’가 바람 스쳐 가듯 잠깐 언급되었지만 공정성에 대한 개념 및 실천의지가 우리 주변에 널리 펴져 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일 터져 나오는 온갖 종류의 비리와 거짓들이 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했지만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백 번, 천 번 외친다고 이 나라에 정의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지금도 ‘죽은 정의의 사회’를 지속시키는 소위 ‘도둑경영’의 사례가 수없이 많이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사회의 시민은 타인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자유시장은 공정한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인 때도 있는가? 도덕적으로 살인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가? 도덕을 입법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개인의 권리와 공익은 상충하는가?”에 대하여 충실한 답을 못 하는 양심불량의 수많은 개인 단체 기업 정부 NGO 모두가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정의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 된 ‘사랑의 열매’로 상징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비리 사건을 비롯하여 양심불량의 도둑들은 정작 자신은 공정하지 않으면서도 남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곧 인간에게 있어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인데 이들에게는 자신의 최선의 삶만이 중요할 뿐이다.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은 행복의 극대화, 자유, 미덕의 추구라고 한다.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 사회적 모순이 발생하는 것일까?

예로 어떤 사람은 테러 용의자를 고문하는 행위는 자유 사회에 걸맞지 않은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하나, 어떤 사람은 이것이 테러를 예방하는 수단이라며 찬성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부자에게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기업은 노력으로 번 돈을 세금으로 빼앗는 행위는 불공정하다고 여긴다.

2008년 삼성특검에서 기소된 이건희 회장은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며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에 2500억 원을 납부했다가 재판이 끝나자 대부분 돌려받았다는 씁쓸한 뉴스가 그 예다.

이에 대하여 며칠 전 경제개혁연대는 이 회장이 삼성특검의 공소장에 기재된 배임액 전부를 지급한 것처럼 재판부를 기망했다며 이 회장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로 검찰에 다시 고발했다고 한다. 불공정한 일을 일삼으면서도 자신이 불공정한지를 인식하지 못 하는 인간들에게 용(用)과 무용(無用)의 구별이 새삼스레 언급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쓸모가 없는 것이 도리어 크게 쓰여진다는 말인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장자>의 서중(書中)에서는 많이 언급되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의 하나로「인간세편(人間世篇)」에 보이는 초나라의 광접여(狂接輿)가 공자에 대하여 말한 비평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산 속의 나무는 유용(有用)하기에 벌채되어 자신의 원수가 되고, 기름은 밝은 빛을 내기에 태워져 자신을 태우며, 육계(肉桂)는 사료가 되고 옻은 도료가 되기에 베어진다. 유용(有用)의 용(用)만 알고, 무용(無用)의 용(用)은 알려고 하지 않으니 서글픈 일이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인의(仁義)로써 난세를 다스리려는 것을 풍자(諷刺)한 것으로, 조그만 유용(有用)은 오히려 자신을 망친다는 것이다. 오히려 무용한 것 가운데에 대용(大用) 즉, 참다운 용(用)이 있다며 장자는 즉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이란 역설의 지혜를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

“칭찬도 받지 않고, 욕도 먹지 않고 그때그때에 순응하여 다소간의 재주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잘 되든 못 되든 되는 대로 버려두고 사람과 다투지 않으며 ‘도’를 따라 몸을 맡겨, 물(物)을 제(制)하더라도 물(物)에 제어(制御)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떠한 누(累)도 남지 않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계절 가을에 가슴에 손을 얹고 되새겨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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