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566년 8월, 인구 10만명의 상업도시 안트베르펜 밖 벌판에 2만 5천명의 군중들이 칼뱅파의 노천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성상(聖像)파괴 난동’을 일으켰다. 이 난동은 8월 10일 서부 프랑드르 지방에서 시작해 2주일도 안 되어 17개 지방에 퍼졌다. 

8월 20일과 21일 사이엔 안트베르펜의 30개 교회가 약탈당하고, 8월22일에는 헨트가 약탈당했다. 성상(聖像)이 파괴되고 성화(聖畵)가 불태워졌다. 

1567년에 프랑드르 지방을 통치하고 있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1527~1598)는 강력 진압을 통해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펠리페 2세의 공포정치는 열렬한 칼뱅주의자인 루벤스의 아버지 얀 루벤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재판관이었던 얀 루벤스는 1568년에 안트베르펜을 떠나 보장된 독일 쾰른으로 이사 갔다.

여기에서 얀 루벤스는 오라녜 공 빌렘 1세의 부인인 안나 공주의 법률 고문이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얀 루벤스는 안나 공주의 연인이 됐는데, 이 사실이 밝혀져 얀은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아내 마리의 중재로 얀은 목숨을 건져 독일 지겐에 유배됐다.

1577년에 지겐에서 루벤스가 태어났다. 지겐에서의 유배가 끝나고 쾰른에 돌아온 얀 루벤스가 1587년에 죽자, 가톨릭 신자인 루벤스 어머니는 다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다.

1588년에 북부 프랑드르 지역 7개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안트베르펜을 위시한 남부 플랑드르 지역은 펠리페 2세에 의해 다시 가톨릭 지역이 됐고, 반종교개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안트베르펜의 지역 유지들은 교회에 성상 및 성화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는 1563년에 채택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종교미술에 대한 결의문에 고무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의 성상들은 교회에서 반드시 형상화되고 보존돼야 한다. 그리고 이에 합당한 존경심이 주어져야 한다.”

이탈리아 로마에 가서 미술수업을 한 루벤스는 1609년에 안트베르펜에 돌아왔다. 그는 프랑드르 섭정의 궁정화가가 됐고 종교화 제작에 분주했다. 루벤스는 1610년에 산타 발부르가 교회의 세 폭 제단화 ‘십자가를 세움’을 그렸다. 1612년에는 병기제조업자 조합이 의뢰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고, 양옆의 ‘마리아의 방문’과 ‘성전에 아기 예수의 봉헌’은 1614년에 완성했다.

1619년에 루벤스는 예수회 성당의 제단 장식을 위해 세 폭 제단화와 39점의 천장화를 주문받았다. 이 중 유명한 그림이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다. 루벤스는 1620년까지 무려 63점이나 되는 종교화를 그렸다. 그의 공방에는 수백명의 견습생이 지원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는데, 안톤 반다이크도 루벤스 공방에서 일했다.

한마디로 루벤스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었다. 바로크(Baroque)는 ‘일그러진 진주’ 또는 ‘불규칙하게 생긴 진주’라는 뜻인데, 바로크 미술은 반종교개혁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했다. 신자들의 시선을 압도할 만한 극적이고 화려하면서 교훈적인 장면을 연출해 가톨릭 교리를 강건히 했고, 미술 그 자체가 신앙고백이었다.

따라서 루벤스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를 실신하는 나약한 모습이 아닌, 슬픔을 극복한 의연한 모습으로 그렸다. 루벤스는 반종교개혁의 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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