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총 작가가 활동해왔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소설계 대부 김병총 소설 작가를 만나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이 시대엔 진정한 ‘사나이’가 없어. 사나이가 없어진 사회에서 시라소니는 바람직한 역할모델이지. 사실 주먹이라는 것은 더럽잖아. 하지만 시라소니는 비겁하지 않아. 아주 애국자이고 신사 가운데 신사야.”

찬바람이 옷깃을 스며드는 날이었다. 당대 문학계를 휘어잡은 작가 김병총(김성택, 71) 선생이 제자 정운영 씨와 함께 인사동에 위치한 ‘시인’이라는 식당을 찾았다. 베레모 모자를 멋들어지게 쓴 그는 과묵할 것이란 첫 이미지와 달리 소설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던 70평생 이야기를 풀어냈다.

◆시라소니 ‘청렴한 협객’

<시라소니> 출간은 시라소니(이성순, 1916~1983)의 아들 이의현 목사가 김 선생에게 아버지의 일대기를 의뢰하면서 부터다. 이 목사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김 선생밖에 없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4년이 돼서야 시라소니 전설은 김 선생 손에서 올곧이 다시 살아났다.

김 선생이 말하는 시라소니를 통해 세상에 하고픈 말이 있었다.

“주먹은 더럽다고 생각하는 게 사회통념이 아니겠어. 그런데 시라소니는 여자 문제도 없었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항상 앞섰지. 불의를 참지 못한 그는 ‘청렴한 협객’이었어. 그래서 남자 뿐 아니라 최근 여자도 시라소니를 좋아해.”

김 선생은 <시라소니>를 쓰면서 다른 것도 수확해냈다. 바로 또 다른 주먹의 전설인 최배달(1922~1994)이었다. 자료를 조사하던 중 시라소니와 최배달이 같은 공간에서 있었던 모습을 찾았다.

“최배달이 어렸을 적에 경찰서장 아들을 팼어. 꼬마였지만 문제가 심각하게 컸다고. 때마침 만주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누나에게로 갔지. 시라소니도 만주에서 그 농장엘 갔지. 그때 최배달이 시라소니에게 무술을 배운 거야.”

◆병총(倂總), 모든 재주를 글로 쏟다
 
시라소니를 예찬하고 있으나 사실 그 역시 만능 스포츠맨이다. 태권도는 기본이요 수영, 펜싱, 축구 등 운동감각이 탁월하다. 김 선생이 나고 자란 곳은 바다가 있는 마산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영은 자연스레 몸에 익히게 됐다.

“어릴 적부터 바다에서 놀았지. 고려대 재학 시절 친구들과 마포나루터에서 한강 중간에 떠 있는 섬까지 헤엄쳐서 왔다 갔다 했지. 당시 사람들 눈엔 놀라움이 가득했지. 어떻게 그 거리를 수영하는지 말이야.”

운동만 아는 김병총 선생이 아니었다. 공부면 공부, 작문이면 작문 하는 일마다 좋은 성과를 나타냈다. 한마디로 주어진 재주가 많았다. 그래서 필명을 아우를 병(倂)에 모을 총(總), 병총으로 지었다. 모든 재주를 아울러서 쏟아내겠다고. 물론 작명할 때엔 장난 반으로 시작했지만 말이다.

다재다능함 속에서 그는 ‘글쓰기’를 생활과 업으로 삼았다. 어릴 적부터 작문은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다. 1957년 정초, 김 선생은 고등학교 3학년 생활이 막바지에 접어든 그때, <연과 얼굴>이라는 동화로 동아일보가 주최한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당시 신춘문예 심사는 학벌과 나이 등을 철저히 가린 채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했다.

“글은 원래 잘 썼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어린이신문에 글이 실렸어. 이원수 선생이 주간이었던 <소년세계>에 내가 쓴 <강아지 바둑이>가 장원으로 뽑혔어. 한국문학 역사상 고등학생 신분으로 수상한 작가는 나와 최인호, 황석영이 전부야.”

이 때만하더라도 그에게 글쓰기는 직업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소설가는 곧 가난뱅이와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 와중에 동료 소설가 최인호 선생이 <별들의 고향>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소설로도 돈을 벌 수 있구나’라고 싶었지. 이제 아내에게 5년의 유예를 받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어. 만 2년이 지나고서야 선우휘 조선일보 고문을 만나게 됐고 조선일보에 연재를 하기 시작한 거야.”

그는 스스로를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소설이라고 할 만치 그가 일을 계획할 때마다 적당한 사람들이 도움의 발판을 마련해줬다. 특히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는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당시 동아일보 주간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김 선생의 글을 읽고 단번에 읽고 그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이 선생님은 한 번 자기 사람이다 싶으면 절대적으로 밀어줘. 그게 참 아직도 고맙지. 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도와줬어. 난 인복이 많은 사람이야.”

◆‘사나이 신념’에 데모 주동자 0순위로

김 선생은 보통 작가들이 그러하듯 방안에 칩거하며 고고하게 창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나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부딪친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해내고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매치기 깡패 투견꾼 여대생 등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상 속에서만 머무는 인물이 아니다.

우리나라 격동기 속에 늘 김병총 선생이 있었다. 마산에서 자란 김 선생은 1960년 3.15운동(마산의거)을 경험했고 이후 고려대 학생들이 펼친 4.18, 4.19혁명에도 그가 있었다. “말도 마. 첫 직장이 부산 동아고등학교에서 강사직이었어. (학교 측이) 1~2년만 잘 버티면 전임시켜준대서 잘 보이려고 돈도 받지 않고 체육과랑 의논해 펜싱부도 만들었지. 그런데 웬걸. 6.3항쟁(한일 협상 반대운동)이 벌어진 거야. 학생들은 데모를 열심히 했었어.”

항쟁이 끝나고 정부는 주동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3.15운동을 시작으로 4.19혁명에 참여한 김 선생의 이력은 주동자로 0순위였다.

“난 그때 데모하지 않았어. 하지만 평소 학생들에게 ‘사나이는 신념대로 살아야 하는 거야’라고 했던 말 때문에 걸렸던 거야. 이 말은 시간과 장소를 떠나 할 수 있는 말이잖아. ‘사나이 신념’ 때문에 걸렸어. 그래서 서울로 1년간 도피생활을 했지.”

이러한 김 선생의 삶을 바탕으로 그의 제자 정운영 씨가 글을 쓰고 있다. 정 씨는 ‘자유’와 ‘정의’를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김병총 선생의 소설은 사람 냄새가 난다. 먼 곳에서 소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 속에서 부대끼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써내려 간다.

그래서 일까. 꽃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의 진한 향이 아닌 저 야생 들판에서 바람을 맞으며 자라나는 들꽃처럼 그에게서도 인생의 깊고 자연의 향이 묻어난다.

김병총 작가 주요 활동
- <연과 얼굴과>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
- <빨간 우산> 제1회 신인상 단편소설 부문 당선
-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 제21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 <여름여자> 제2회 박영준 문학상 수상
   그 외 다수 수상

주요 작품
<내일은 비> <태양의 딸> <검은 휘파람> <샤론여자고등학교> <사마천의 사기> <시라소니> 등 70여 권의 저서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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