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부터 은행이 업무에 사용했던 다양한 물품들과 업무공간을 재현해 놓은 홍보관의 모습. ⓒ천지일보 2018.12.21
1930년대부터 은행이 업무에 사용했던 다양한 물품들과 업무공간을 재현해 놓은 홍보관의 모습. ⓒ천지일보 2018.12.21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도심 속 힐링과 교육 공간 제공

은행업무도 보고 박물관 관람도

시대별 우리나라 은행 스토리 담겨

1천점의 각 나라 저금통 전시돼

[천지일보=박수란 기자] 대단스러운 힐링 장소가 아니더라도 도심 속에서 잠깐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아이들에겐 교육 장소로도 제격인 곳이다.

바로 서울 중구 회현동의 우리은행 본점 지하에 있는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이 이곳이다. 우리은행에 은행 업무를 보러 왔다가 박물관을 한바퀴 ‘휙’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실제로 기자가 방문한 지난 12일에는 근처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은행에 왔다가 박물관 구경을 하러 들어온 일행들이 있었다.

백은정(52, 여)씨는 “직장 동료와 은행 볼일을 보러 왔다가 문화생활도 즐길 겸 박물관 표지판을 보고 들어왔다”면서 “옛날 남대문로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이처럼 은행사박물관은 평일에도 솔솔잖게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유치원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단체 관람객들의 교육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박물관에는 우리은행의 전신이 된 대한천일은행 창립 이전부터 우리나라 은행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단체 예약 관람객에 한해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을 수도 있어 박물관을 둘러보는 재미를 더한다.

박물관 입구에는 ‘1899년’을 나타내는 커다란 모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는 대한천일은행의 창립년도로, 우리은행이 올해로 119주년이라는 긴 역사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곳은 시대별로 우리나라 은행의 변천사를 각종 자료와 영상, 모형 등을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해 놨다.

전시돼 있는 은행 변천사를 보면 우리나라에 처음 은행이 설립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전으로, 주요 항구를 중심으로 일본 등 외국계 은행이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다 상인들이 자본을 지키기 위해 민족 자본으로 만들게 된 것이 바로 대한천일은행이다.

역사적으로 더 의미가 있는 것은 고종황제가 황실 자금인 내탕금을 자본금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대한천일은행은 대한제국 하늘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뜻을 지녔다.

대한제국시기 금융 관련 자료가 많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한천일은행 창립문서와 회계장부 등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는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돼 2014년 6월 국가기록원은 대한천일은행 창립 및 회계 관련 기록물을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했다.

1900년 초반에는 서울 남대문로에 금융권이 모아져 있었다. 사진은 당시 금융의 거리였던 남대문로를 모형화한 모습. ⓒ천지일보 2018.12.21
1900년 초반에는 서울 남대문로에 금융권이 모아져 있었다. 사진은 당시 금융의 거리였던 남대문로를 모형화한 모습. ⓒ천지일보 2018.12.21

일제강점기가 지나고 국내 상황이 좀 나아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또 다시 우리나라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박물관 한켠에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현직 은행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현한 드라마를 상영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이기정 학예연구사는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갈 때 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에 모여들었는데 은행원들은 피난 대신 끝까지 은행 업무를 봤다고 해요. 하루 동안에 너무 많은 돈을 인출해가니 은행원들은 리어카를 끌고 중앙은행을 몇 번씩이나 왔다갔다 했다고 해요”라고 설명했다.

전쟁 이후 우리나라 은행들은 북한 지역의 점포를 모두 잃어버렸다. 당시 북한 지역은 자원이 풍부해 남한에 비해 산업이 굉장히 발달한 곳이었다.

1960년대에는 산업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은행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한다. 때문에 나라에서 장려했던 저축생활운동 모습이나 이를 위해 다양한 예금상품이 쏟아져 나왔던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도록 전시관이 꾸며져 있었다.

1997년 IMF 금융위기가 들이닥치면서 당시 나라 빚을 갚기 위해 국민들이 금모으기 운동을 벌인 것을 모형으로 재현해놨다. ⓒ천지일보 2018.12.21
1997년 IMF 금융위기가 들이닥치면서 당시 나라 빚을 갚기 위해 국민들이 금모으기 운동을 벌인 것을 모형으로 재현해놨다. ⓒ천지일보 2018.12.21

이후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가 들이닥쳤다. 박물관에는 당시 나라 빚을 갚기 위해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국민들이 금모으기 운동을 벌인 것을 모형으로 재현해놨다.

이곳을 지나면 홍보관이 나온다. 우리은행의 119년이라는 역사를 자랑하듯 그간 은행이 업무에 사용했던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이 학예연구사는 “이곳은 어르신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공간이며 아이들에게는 역사 공부를 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1930년대, 1960년대, 1980년대, 2000년대 등 시대별로 은행 영업점의 모습이 변화한 것을 재현한 모형들이 놓여있었고 주판, 시대별 통장 등도 진열돼 있었다.

1천여점의 각 나라의 저금통이 전시돼 있는 ‘저금통 갤러리’는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을 특별하게 만든다. ⓒ천지일보 2018.12.21
1천여점의 각 나라의 저금통이 전시돼 있는 ‘저금통 갤러리’는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을 특별하게 만든다. ⓒ천지일보 2018.12.21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이 특별한 이유는 ‘저금통 갤러리’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은행은 1995년부터 각 나라의 저금통을 6천여점이나 모았으며 이곳 전시관에는 1천여점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는 다양한 만화 캐릭터·동물과 작동저금통, 고가의 저금통 등 희귀한 저금통을 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황금마차’라 이름 붙여진 저금통은 마차 모양으로 바퀴와 지붕 위에는 루비로 장식돼 있어 상당한 고가의 저금통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저금통도 있었다.

이 학예연구사는 “저금통은 단순히 돈을 저장하는 공간이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와 시대상을 보여준다”며 “대부분 그 시대의 문화 아이콘을 저금통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저금통하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돼지 저금통’의 유래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중세 유럽에서 돈을 모으는 항아리를 ‘피기’라는 흙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피키뱅크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를 했는데 돼지의 ‘피기’로 알아듣고 저금통 모양을 돼지로 만드는 바람에 이를 계기로 돼지 저금통이 생겼다는 유래가 있다”고 말했다.

은행의 역사도 한눈에 보고 각 나라의 각종 저금통도 만나볼 수 있는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에서 잠시 머물다가 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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