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황작보후(黃雀步後)
[고전 속 정치이야기] 황작보후(黃雀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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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오월춘추(吳越春秋) 부차내전(夫差內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오왕 14년 부차가 오자서(伍子胥)를 죽인 후, 이상하게도 해마다 흉년이 들어 곡식이 여물지 않았다. 백성들의 원망이 자신에게 쏠리자 부차는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제나라를 치기로 결심했다.

군사와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운하를 파서 상(商)과 노(魯) 사이를 연결해 북쪽으로는 기수(沂水)와 서쪽으로는 제수(濟水)까지 수로를 확장했다. 또한 노와 진(晋)을 황지(黃池)에서 만나 함께 제를 치자고 했다. 많은 신하들이 북벌의 위험을 지적하자 오왕은 반대하는 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누구도 감히 반대하지 못하자 태자 우(友)가 나섰다. 그도 부왕의 분노가 두려워 고민하던 끝에 풍간(諷諫)을 하기로 결정했다. 어느 날씨가 맑은 날 아침, 태자는 둥근 탄환을 가지고 후원을 뛰어다녔다. 겉옷과 신발이 몽땅 젖은 것을 본 부차가 연고를 묻자 태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후원을 걷고 있을 때 마침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달려와 보니 매미라는 놈이 높은 가지에 앉아서 맑은 이슬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소리를 따라서 찢어지는 듯 구슬픈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매미는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겼지만, 곁에 있는 가지에서 사마귀가 달려드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마귀란 놈은 또 황작(참새)이 날개를 펴고 대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황작은 나뭇가지를 배회하며 사마귀를 잡아먹을 생각으로 신이 이 탄환으로 제 등을 겨냥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도 탄환을 던지느라고 곁에 있던 웅덩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빠지고 보니 깊은 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옷과 신발이 모두 젖어서 대왕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차도 무심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천하의 환란은 언제 다가올지 누구도 모른다. 눈앞의 이익만 탐하여 바로 뒤에 닥칠 위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태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근심은 더욱 깊은 곳에 있습니다. 주공(周公)이 봉해진 노나라의 백성 가운데 공구(孔丘)라는 이는 어진 것을 지키고 덕을 끌어안아서 가까운 나라를 차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는 자주 군사를 일으켜 백성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제는 군사를 일으켜 노를 차지할 생각으로 우리 오가 전 병력을 동원해 자기들을 치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를 정벌하더라도 오나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배후에 있는 월왕은 우리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결사대를 뽑아 삼강(三江)의 입구로 나와 오호(五湖)로 들어와 우리를 도륙하려고 할 것입니다. 천하의 위태로운 일 가운데 이보다 더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부차는 태자의 간언을 듣지 않고 북벌군을 일으켰다가 결국 나라를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당랑포선(螳螂捕蟬) 황작보후(黃雀步後)’라는 격언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등 뒤에서 다가오는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중국 역사상 맹활약을 펼쳤던 정치가, 음모가, 야심가들은 모두 이러한 이치를 깊이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적에게 목전의 이익을 두고 서로 싸우도록 유도한 다음, 자신이 개입해도 좋을 만한 기회를 이용해 일거에 승리를 얻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이익을 노리는 틈을 노리는 자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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