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루벤스(1577~1640)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서 성모 마리아를 실신한 것으로 그리지 않고 왜 의연하게 그렸을까? 이는 1517년의 종교개혁 그리고 이에 대응한 반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다.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이며 신학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城)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를 항의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붙였다.

수도사 테첼은 면죄부를 팔면서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해준다고 약속했다. 면죄부 판매 대금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자금이었는데, 이는 로마 교황청의 타락과 부패의 전형이었다.

루터는 ‘95개조의 논제’ 중 제36조에서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은 면죄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죄를 사면 받을 권한을 가진다”라고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에 정면 도전했다.

루터의 반박문 95개조는 구텐베르크(1397~1468)의 인쇄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쇄돼 독일 전역에 퍼졌다. 종교개혁의 불씨가 당겨진 것이다.

위기를 느낀 로마 교황청은 1520년 11월에 루터를 파문했다. 그러자 루터는 12월 10일 비텐베르크 광장에서 교황의 파문장과 교회 법전 등을 불태웠다. 1521년 4월에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 소환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감금 직전이었던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 공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그는 1522년에 독일어판 신약성서를 출간해 대중에게 보급시켰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었다.

이후 루터파 교회는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주동자는 2세대인 장 칼뱅(1509~1564)이었다. 1536년에 칼뱅은 제네바에서 ‘기독교 강요(綱要)’를 출간해 ‘예정설’을 주장하고 노동과 금욕을 중시했다. 또한 신에 의해 이미 결정된 소명, 즉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칼뱅주의가 시민들에게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자극시키자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스위스·프랑드르 지방(지금의 네델란드와 벨기에)·영국·스코틀랜드 등지로 확산됐다.

한편 가톨릭은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교리의 정립, 무능하거나 타락한 성직자에 대한 처벌과 규제, 예수회의 활발한 선교와 교육 사업, 기존의 교리와 성찬식 고수, 성상(聖像)과 성화(聖畵)의 유지 등을 통해 신교의 도전에 정면 대응했다. 반종교 개혁이었다.

여기에서 성상과 성화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칼뱅은 성모 마리아와 다른 성인들의 성상과 성화에 대해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보였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 무엇과도 비슷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서 구절에 따라 성화와 성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그릇되게 표현하고 변질시킨다.’ (칼뱅 ‘기독교 강요’)

한편 프랑드르 상업도시 안트베르펜은 일찍부터 루터파의 거점이었으나 1550년부터 칼뱅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1560년경에 칼뱅주의는 겐트·발랑시엔 등 프랑드르 지방 전체로 확산됐고, 1566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성상(聖像)파괴운동이 일어났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