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0월 말이면 ‘종교개혁 주간’으로 16세기 부패했던 중세 종교상을 짚어보며, 오늘날의 종교 즉, 기독교의 부패상을 꼬집어 가며 너도나도 개혁과 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외치는 자는 많으나 그 부패와 타락의 골은 점점 더 깊어만 가니, 그 외침은 정녕 허황된 소리요, 알맹이 없는 울림으로 그친다.

1517년 10월 31일 정오, 루터는 면죄부의 해독을 주장하며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게시판에 ‘95개조의 항의문’을 게시했다. 이 항의문은 공개된 지 2주 만에 독일을 덮었고, 4주 만에 전 구라파를 불 질렀다. 물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1450년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인쇄술’이었다.

오늘날도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부패와 타락은 중세 나아가 칼빈의 막장 종교와 다를 바가 없으며, 어쩌면 더한 지경에 직면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러한 때 범종교지로서 본지가 담당한 사회는 물론 종교언론의 역할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 종교와 사회에 주문하고 싶은 것은 종교의 잘못된 문화로부터 야기되는 종교인의 의식이며 가치관이다. 이는 단순 종교만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로 전염되어 온 세상을 혼탁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종교의 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의 본질인 말씀의 부재며 신의 가르침을 무시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외형적 신앙에 길들여져 있는 종교문화는 결국 종교는 물론 온 세상을 피폐케 하고 말았다.

여기서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한 예로 보자. 한국 기독교의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기총은 이미 정치적 목적을 달성키 위해 탄생됐으니 그 태생이 벌써 성서적이지 못하다. 수많은 교단으로 분리케 유도해 신의 뜻을 갈라놓고, 이로써 나타나는 현상은 사회는 물론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 잘못된 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음도 부인할 수 없다.

즉, 분열 편파 편견 편향의 저급하고 치졸한 문화의 생산지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이 나라에서도 불가피한 종교개혁의 불씨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종교의 개혁은 시작됐다 함이 맞을 것이다. 다만 귀가 없어 듣지 못하고, 눈이 없어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한국교회의 갱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다. 16세기와 오늘날의 종교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각종 세미나와 포럼도 열린다. 이러한 행사를 통해 복음에 대한 강력한 외침과 5백여 년 전 종교개혁의 참된 의미와 루터의 신앙 일대기를 다시 조명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해가 거듭할수록 종교의 부패상은 깊어지고, 사회마저 타락의 말로를 맞게 되는가.
결국 이 세상은 기독교의 종말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타락의 정도는 이제 도를 넘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은 타종단의 사찰까지 점령, 영상으로 기독교식 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그 영상엔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큰 우상 숭배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면서 “이 땅은 하나님의 땅이라는 것을 선포하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 영상은 봉은사 내 전경을 보여주며 ‘사람이 만든 우상들’ ‘헛된 것들’이라고 부연 설명까지 했다.

과연 종교의 뜻일까. 하나님이 계신다면 결코 이들의 하나님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과, 우상은 바로 오늘날 말씀 없이 세상 것 즉, 돈 명예 권력을 좇는 종교지도자 내지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우상이었음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경서엔 외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절이 있다.
이들에겐 진리가 없는 우상이요, 우상숭배자들이니 이해와 배려와 존중과 사랑이라는 자유함 대신,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에 갇혀 핍박하고 조롱하고 정죄하니, 신앙의 본질을 한참 벗어난 불쌍한 중생들임을 아마 본인들만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다.

이제 참 개혁의 바람이 폭풍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고 있으니 옳은 것을 스스로 분별하는 종교인이 되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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