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채근담(菜根譚)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말이 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하라’는 뜻이다. 곱씹어 볼수록 말의 풍미가 가득하다. 특히 정치 지도자나 고위 공직자들에겐 늘 가까이 두고 새겨야 할 금언(金言)이라 할 만하다. 이 글귀는 고(故) 신영복 선생이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에게 선물한 글로도 유명하다. 춘풍추상(春風秋霜), 그 뜻 그대로 자신의 삶을 살았던 신영복 선생이 직접 쓴 글을 액자에 담아 참여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선물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정권재창출을 이루지도 못했으며 또 비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아픈 대목이다.

이 글귀는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세상 밖으로 꺼냈다. 올 초인 지난 2월 문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진에게 당시의 이 글귀를 액자에 담아 선물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공직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 살아가며 이보다 더 훌륭한 좌우명은 없다고 생각한다. 공직에 있는 동안 이런 자세만 지킨다면 실수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남들에게 추상같이 하려면 자신에게는 한겨울 고드름처럼 몇 배나 더 추상과 같이 대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만큼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반드시 ‘성공한 정부’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들리는 대목이다.

글의 뜻이 뒤집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불과 1년 6개월 만에 우려할 만한 ‘위기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단순히 국정지지율이 최저치로 떨어졌다는 뜻만은 아니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리고 민심은 흉흉해지고 있으며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와 여권의 현실 인식은 안이하다 못해 오만할 정도로 민심과 동떨어져 있다. 하루가 고된 국민들에게 내년 말쯤이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마약’같은 허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추경예산 등 엄청난 재정을 투입했지만 ‘일자리 창출’은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있다. 그리고 불과 1년여 만에 역대급 부동산 가격 폭등을 촉발시켜 놓고선 부동산 시장이 이제 안정되고 있다는 코미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춘풍추상의 시금석 같았던 공직자 인선과 그 책임 논란에 대해서는 무능이 아니라 무치(無恥)에 가깝다. 스스로 정한 공직자 인선의 원칙까지 포기하더니 임면권은 대통령에게 있다며 진짜 대통령만의 뜻대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인사청문회를 왜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보니 정부 각 부처의 역량은 의심할 만큼 미흡하다.

반면에 청와대 권력은 워낙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불과 몇 명의 스타급 참모들이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모습만 부각되고 있다. 최근 논란이 커지고 있는 조국 민정수석은 그 핵심에 있는 인물이다. 사실 조 수석은 참 괜찮은 법학자로서 명성이 높은 인물이다. 젊은 시절 ‘사노맹 사건’이 말해주듯이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 대열에 섰던 ‘양심’이기도 했다. 그 후에도 조 수석의 길은 정의와 진보의 길에서 옆길로 새지도 않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의 신뢰는 이렇게 다져진 것이다. 그런 조 수석이 문재인 정부의 초대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촛불혁명’의 뜻을 이어 ‘적폐청산’에 나서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에서 조 수석만한 인물이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법개혁을 비롯해 권력기구의 적폐청산을 지휘하는 조 수석의 역할은 어쩌면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청와대로 들어간 조국 수석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인사검증을 책임진 당사자로서 보여준 역량은 충격적일만큼 기대 이하였다. 엄격하지도 정밀하지도 않았으며 공정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는 편가르기식 인사행태는 이전 정부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만 생기면 국회 탓, 언론 탓 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시점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반부패비서관실 특별감찰반원들의 비위행태가 터졌다. 일부 인사들의 일탈행위를 보면 박근혜 정부 때의 그것이 생각날 정도로 기강 해이는 물론이요 그들 스스로가 ‘적폐’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청와대에서 공직기강을 책임진 인사들의 공직기강 해이, 이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대목이다. 이보다 더 위급한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조국 수석이 즉각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며 이를 계기로 더 높은 강도의 공직기강 모범을 보여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사건의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급급했다. 특별한 설명도 없이 당사자들을 원대 복귀시키더니 당국이 조사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조국 수석의 사퇴 얘기가 쏟아졌지만 문 대통령은 오히려 힘을 더 실어줬다. 이러고도 대한민국 공직사회의 기강이 제대로 설 것이라고 보는 것이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신뢰가 계속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문재인 정부의 좌초를 바라지 않는다면 조 수석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 더 강력한 적폐청산과 공직기강의 확고한 재정립을 위해서라도 미련 없이 물러나야 한다. 음참마속(泣斬馬謖)의 경구를 경청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보낸 액자의 글귀가 벌써부터 왜 뒤집히고 있는지 참담한 심정이다. ‘대인추상(待人秋霜)’과 ‘지기춘풍(持己春風)’으로 거꾸로 읽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문 대통령이 언급한 그 ‘한겨울의 고드름’은 벌써 다 녹아버렸단 말인가. 부디 조 수석도 시류를 좀 더 멀리 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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