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담양 ①] 소쇄원(瀟灑園), 올곧은 선비의 원림에 바람과 달빛이 머물다
[문화재 탐방-담양 ①] 소쇄원(瀟灑園), 올곧은 선비의 원림에 바람과 달빛이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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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도 소쇄(瀟灑: 기운이 맑고 깨끗함), 공기도 소쇄, 4계절의 정취까지 소쇄. 모든 것이 소쇄하다고 해서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조선시대 대표 원림 소쇄원.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고 나면 아담하지만 그 옛날 올곧은 선비정신이 깃든 별서정원(別墅庭園)에서 마주하는 사림정신.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인공적인 미가 어울려 탄생하게 된 소쇄원의 정취를 느껴보자.

◆‘달’과 ‘바람’이 머무는 곳 소쇄원

마치 올곧은 선비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듯 하늘높이 곧게 자란 대나무 숲을 지나 마주하게 되는 소쇄원. 계절별로 뚜렷한 정취를 뽐내는 소쇄원의 중심에는 심금을 울리는 계곡이 자리 잡고 있어 그 운치가 더욱 화려하다.

원림을 가로지르는 계곡 사이로 자연과 인공이 절묘하게 어울려 조경학적미와 건축미가 돋보이는 소쇄원에는 입구 쪽에 난 담장을 따라 대봉대(待鳳臺)가 제일 먼저 객들의 위한 쉼터를 제공한다.

 

▲ 광풍각. (출처:담양군청)


대봉대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북쪽 산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조담과 오곡문을 관통하는데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에 소쇄원의 창건자 소쇄 양산보(梁山甫, 1503~1557) 선생의 염원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 옛날 여름이면 오곡문 사이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자연을 벗 삼아 시 한 수 읊었을 선비들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오곡문을 지나면 2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는데 주로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꽃나무가 심겨있었다고 한다. 또 이 소쇄원의 문패격인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매대를 가운데 놓고 윗 쪽에 자리한 제월당(霽月堂). 주로 양산보 선생이 기거했던 제월당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으로 정면 3칸과 측면 1칸, 한옥의 대표방식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제월당 뒤편에 있는 낮고 짧은 굴뚝이 특이한데 이는 공부방의 개념도 겸하던 제월당이 너무 따뜻해 졸음이 밀려오지 않게 하려는 선비의 절제정신이 만들어낸 진풍경이라 볼 수 있다.

또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1548)’가 게액되어 있고, 영조 31년인 1755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가르쳐준다.

매대 아래쪽에 위치한 광풍각(光風閣)은 정면 3칸의 측면 3칸 팔작지붕 건물로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광풍각의 굴뚝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양새로 하늘을 향한 것이 아닌 계곡을 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최대한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인공의 미를 더한 소쇄원은 하서 김인후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라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선비들의 화합과 교류의 장으로 활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남 사림문화의 근거지 소쇄원

맑고 깨끗하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소쇄원은 조선시대 문인인 소쇄 양산보(梁山甫, 1503~1557) 선생이 1520년대 후반에 창건했다. 조선시대 민간원림으로 정유재란 때 건물이 불타 소실됐으나 손자인 양천운(梁千運, 1568∼1637)이 1614년에 재건했다.

 

▲ 소쇄원 설경. (출처:담양군청)


총명하고 단정한 성품을 지녔던 양산보 선생은 15세에 스승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의 나이 17세인 1519년에는 현량과에 급제했지만 반대세력에 부딪혀 낙방하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중종이 직접 양산보 선생에게 지필묵을 하사하면서 위로를 건냈다.

하지만 그해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고 유배당하자 화순 능주로 유배지까지 직접 스승을 모셨지만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사망하게 된다. 이를 목격한 양산보 선생은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세속에 대한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소쇄원을 짓게 된 것이다.

은둔한 선비의 정원이지만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이곳을 드나들며 정치와 학문 등을 논하게 돼 소쇄원은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교류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양산보 선생은 이러한 소쇄원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얼마 후 정유재란이 일어 건물이 불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손자 양천운이 다시 재건하게 되고, 5대 손인 양경지에 의해 복구됐다.

현재는 사적지에서 승격돼 우리나라 명승 제40호로 지정됐다.

정치적인 이유로 출세의 기회가 사라지자 왕의 위로와 지필묵을 받아 들었던 손이 훗날 은둔 선비의 정원을 짓는 손으로 바뀌어 버렸던 소쇄 양산보 선생의 삶.

그러나 선비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학문에 열중하며 또 다른 내일을 열어갔던 양산보 선생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진 소쇄원. 모든 것이 맑고 깨끗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소쇄원에서 그의 선비정신은 바람과 달빛마저 머무르게 했는지 모른다.

제월당 처마 밑에서 바라본 광풍각은 벗을 기다리던 마음보다는 스승의 못다 이룬 꿈과 그리움,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갈망을 염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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