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15)
[박관우 칼럼]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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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약용(丁若鏞)이 정조의 명으로 곡산도호부사에 부임한 이후 알게 된 백성이 이계심(李啓心)이란 인물이었다.

전임 도호부사 시절에 포수보 면포 한필 대금으로 돈 900푼씩을 거두어 들였는데, 이계심이 백성 1천명을 인솔하고 관청에 들어가 항의하자 부사가 벌을 주려하니 1천명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계심을 둘러싸고 계단으로 올라가며 소리를 지르니 천지가 동요했다.

아전과 관노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자 이계심은 달아났으며 오영(五營)에서 기찰하여 체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암(俟菴)이 부임한 것을 알게 된 이계심은 백성들의 건의사항 10여 조목을 기록하여 올리고 결국 자수하였다.

사암은 주위에서 이계심을 체포하기를 권유하였으나 석방하면서 말하기를 “관장(官長)이 밝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백성이 제 몸만 위하느라 교활해져서 고치기 어려운 폐단을 보고도 관장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백성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암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었다.

곡산 향교에 “오례의(五禮儀)”가 있었는데 그 책에는 포목을 재는 자의 그림이 실려 있었는데 그림의 자와 그때 사용하는 자를 비교하니 차이가 2촌이나 있었다.

그래서 그림의 자에 맞도록 자를 새로 제작하여 서울 군영에서 사용하는 구리자(銅尺)와 일치시켜 면포를 거두었더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그 이듬해에는 포목이 더욱 귀해져서 칙수전(勅需錢)과 관봉전(官俸錢) 2천냥을 풀어 평안도에 가서 포목을 사다가 서울에 바칠 것을 충당하고 그 가격을 백성들에게서 징수해 채웠는데 한 집에 200푼이 넘지 않아서 백성들은 호마다 송아지를 한 마리를 얻은 셈이었다.

사암은 환곡(還穀)의 이용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곡식을 꾸어줄 때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나누어 주고, 거둘 때는 한꺼번에 운반하도록 했다.

그래서 환곡 정리도 빠르고 깨끗이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이 고르게 환곡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접 돌아다니며 나누어 주었으며, 백성들끼리 다투는 송사가 벌어졌을 때는 공정하게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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