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혜경궁 김씨’가 요즈음 겨울 정국을 강타하고 있다. 현 집권세력의 배경인 친문과 반문으로 나뉜 알력은 이 사건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혜경궁 김씨는 지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적극적으로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면서 상대 후보를 폄하하는 데 앞장섰다. 경찰은 혜경궁 김씨 트위터 계정 장본인이 이재명 지사 부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재명 지사는 이를 강력 부인했다. 죄 없는 아내를 치지 말고 차라리 나를 때리라고 배수진을 쳤다. ‘혜경궁’은 본래 정조의 생모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홍씨가 살던 궁의 당호(堂號)였다.  그녀의 남편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부른다. 훗날 사건을 낱낱이 기록했는데 그것이 ‘한중록(閑中錄)’이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영조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부왕을 어려워한 사도세자는 그만 정신이상자 이상의 돌출행동으로 파행을 맞는다.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그 당시 어떻게 처신한 것일까.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영조 앞에 끌려가는 날도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남편을 배웅했다. 사도세자는 그것이 원망스러웠다. 홍씨는 한중록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록한다. 

- (전략)…나인에게 아들의 휘항(방한모)을 가져오라고 하니, 몽매(夢寐)밖에 썩 하시기를 ‘자네(혜경궁 홍씨)가 아무래도 무섭고 흉한 사람이네. 자네는 세손을 데리고 오래 살려고, 내가 오늘 죽게 될 것이니 사위스러워 세손의 휘항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심술을 내가 알겠네’라고 말씀하시니, 내 마음은 당신이 그날 그 지경에 이르실 줄을 모르고, 이 일의 끝이 어찌 될까? 사람이 다 죽을 것 같은 일이요, 우리 모자의 목숨이 어찌 될 것인가?(의역. 하략)… -

혜경궁 홍씨는 당시 남편보다도 어린 아들을 걱정했다. 차마 부왕이 남편을 죽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죽을 수도 있다고 예견하며 아들 방한모를 주지 않은 아내를 원망하고 있다. 

홍씨는 침묵으로 자신과 아들 정조 그리고 친정을 지켰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면서 근시를 보내 며느리의 동태를 살폈다. 홍씨는 부군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거나 영조에 대한 원망을 빛을 띠지 않았다. 

영조는 홍씨를 며느리로 삼을 때 특별히 서신을 보내 처신을 당부했다. 그것은 궁중의 일에 침묵하고 못 본 체 하면서 앞에 나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홍씨의 침묵으로 아들은 왕위에 올랐고 끝내는 부군의 한을 풀었다. 

현대판 ‘혜경궁 김씨’가 이재명 지사 부인이라는 판단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경찰 발표대로 부인이 남편 선거에 개입해 상대 후보의 명예를 훼손했다면 옳은 일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정치인 아내가 남편을 제치고 나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조선 혜경궁처럼 침묵으로 숨어 지내는 것이 화를 입지 않는다. 과거 경기지사를 역임했던 한 분도 부인이 설치는 바람에 정치생명이 끝났다. 

지금 국가는 백척간두의 상황이다. 전직 장성들이 나서 안보 해이를 크게 걱정했다. 불황으로 국민들은 고단한 삶을 호소하고 직장이 없는 청년들의 탄식은 높아가고 있다. 임금인상으로 폐업하는 중소기업도 늘어간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집권여당이 ‘혜경궁 김씨’ 문제로 패닉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차기 대권을 앞둔 집권당의 권력투쟁이라면 더더욱 비판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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