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한국
[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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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프랑스 보병의 돌격(1914) ⓒ천지일보 2018.11.23
프랑스 보병의 돌격(1914) ⓒ천지일보 2018.11.23

2018년 11월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이 되는 달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 제국(현 터키 전신)이 동맹하여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1917~1918), 일본 등 연합국을 상대로 벌인 세계전쟁이다.

1914년 7월 28일 일어나 꼭 100년 전인 1918년 11월 11일까지 4년 3개월 2주일 동안 전개된 이 전쟁은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와 태평양 제도, 중국 산동반도 등 동서양 각지에서 벌어진 역사상 최초의 세계전쟁이며, 승리를 위해 군사력은 물론, 산업과 과학기술, 국민의 인적 물적 자원 등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한 총력전이었다. 양 진영에서 동원한 군인 수가 7천만 명이 넘었으며, 기관총(영국), 항공기(영국, 프랑스, 독일), 탱크(영국), 독가스(독일), 잠수함(독일), 곡사포(오스트리아)가 개발되어 처음 사용되었다. 과학이 전쟁에 활용됨으로써 급격히 커진 무기의 살상력으로 양 진영 군인 약 9백만 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1280만 명이 넘었으며, 민간인도 7백만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또한 전쟁 막바지에 ‘스페인 독감’이라 불린 유행성 인플루엔자가 전 세계에 퍼져 최소 5천만명, 통계에 잡히지 않은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지역 등지를 감안하면 약 1억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한다. 우리나라도 조선총독부 통계에 보면 약 13만명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14년 당시 유럽은 한편에서는 경제적 번영, 각종 발견과 발명,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류의 끝없는 진보를 상상하던 시기였다. 다른 한편, 유럽 열강들은 서로 복잡한 동맹관계로 얽혀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 중앙의 프러시아는 비스마르크 수상 체제 하에서 게르만 민족의 오랜 분열을 끝내고 통일을 추구했다. 이 통일과업은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보불전쟁)에서 승리하여 파리에서 빌헬름 1세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완성되었다. 이후 독일의 국력이 급상승했다. 비스마르크는 서쪽의 숙적 프랑스, 동쪽 러시아와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프랑스, 러시아와 3국 동맹을 맺었다. 그러다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가 되면서 비스마르크를 사퇴시키고(1890), 적극적인 대외 팽창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독일은 중국의 칭다오(靑島)를 조차하고, 강력한 해군 건설에 나서 영국과 군비경쟁을 시작했다. 독일의 기술력, 과학력으로 국력이 급상승하자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하고, 여기에 영국이 가세하여 영-불-러 삼국협상으로 이어졌다.

이에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어 이에 대항했다. 그중 프랑스의 배후에 있는 이탈리아는 3국 동맹에 참여하면서도 독일의 침공 시 프랑스에 대해 중립을 지킬 것을 비밀리에 약속했다.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종전을 축하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시민들(1918. 11. 11) ⓒ천지일보 2018.11.23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종전을 축하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시민들(1918. 11. 11) ⓒ천지일보 2018.11.23

발칸반도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가 발칸동맹을 결성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이 지역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 사이에 1912년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발칸지역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다. 그 후 전쟁에서 얻은 영토의 분할을 놓고 발칸 동맹국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1913년에는 불가리아를 상대로 세르비아와 그리스, 루마니아의 세 나라가 뭉쳐 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불가리아가 패배했다.

복잡한 정세와 복잡한 민족문제가 뒤엉킨 발칸반도는 곧 유럽의 화약고로 불렸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Franz Ferdinand)가 세르비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에 의해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해 최후통첩을 내고 7월 28일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을 열었다. 7월 30일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8월 1일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선전포고를 했다. 8월 2일 프랑스는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전면적인 동원령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이 기회에 보불전쟁에서 독일에게 빼앗긴 알사스 로렌 지방을 되찾고, 군비를 강화해온 독일을 견제하고자 했다.

프랑스와 러시아 양면에서 적을 갖게 된 독일은 먼저 서부전선에 군사력을 집중시켜 1달 안에 프랑스를 굴복시킨 다음, 광대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의 동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러시아를 침공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8월 3일 새벽 프랑스로의 진입로에 있는 벨기에로 침공하면서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영국도 프랑스 편에서 참전을 선언했다.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일본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양진영은 적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상대국 식민지 치하 약소민족의 독립을 부추겼다. 영국은 중동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옥스퍼드대 출신의 고고학자이자 정보장교인 토마스 E.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를 투입하여 아라비아 반도 유목민들의 독립을 부추겼다. 독일은 영국 지배 하의 아일랜드, 러시아 지배 하의 리투아니아 등 발틱 3국과 흑해 연안의 아르메니아 등의 독립을 지원했다.

 

프랑스 제87연대의 베르던 참호 속 전투대비 장면(1916) ⓒ천지일보 2018.11.23
프랑스 제87연대의 베르던 참호 속 전투대비 장면(1916) ⓒ천지일보 2018.11.23

독일의 프랑스 속전속결 계획은 파리로 향하는 중간에 있는 마른(Marne) 전투에서 막혔다. 이후 서부전선은 1917년까지 지루한 참호전으로 진격도 퇴각도 못하게 되었다. 독일은 동부전선으로 주력을 이동시켜 타넨베르그 전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독일은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멕시코로 하여금 미국을 침공하여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나의 엣 영토를 되찾도록 부추겼다. 영국이 이 비밀전문을 입수하여 미국에 알렸다. 거기다 독일이 식량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U-보트라는 잠수정으로 공해상에서 민간인 선박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가하여 미국 상선 7척을 침몰시켰다. 이에 미국은 1917년 4월 6일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의 참전은 전세를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환시켰다.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가 차례로 항복했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날 독일의 킬(Kiel) 군항에서 해군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독일 각지의 노동자 파업으로 번져갔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제위를 물러나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군주제를 포기하고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1917년 연합국인 러시아군 휘하에 독립군단을 편성해 참전했다. 이 군단은 그해 7월 우크라이나의 즈보로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싸워 이겼다. 바흐마흐 전투에서는 독일군을 꺾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체코군단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시베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점거했다. 러시아 혁명정부가 전쟁을 포기하자 체코 독립군단은 불안한 유럽지역 러시아 항구를 피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했다. 그들은 1920년 9월 미국 선박 헤프론호를 타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 체코군단이 떠나면서 연해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한인 독립군에게 무기를 양도했다. 청산리 전투 승리의 배경에는 이렇게 확보한 체코 무기가 있었다.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종전을 축하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시민들(1918. 11. 11) ⓒ천지일보 2018.11.23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종전을 축하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시민들(1918. 11. 11) ⓒ천지일보 2018.11.23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전후 처리 방안의 하나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 지배 하의 약소민족의 독립을 통해 침략국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 치하의 발트해 연안 3국 및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가 독립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고 각각 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세계는 바야흐로 자유와 민주, 독립의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정세가 국내외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3.1운동을 일으킬 영감과 용기를 주었다.

전후 처리를 위해 전승국 대표들이 파리 베르사이유궁에 모였다. 각국의 정부 빛 민간단체들이 여성인권, 약소국 독립 등 모든 현안 문제를 파리 강화회의 의제에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인도 한국 독립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김규식 박사를 비롯한 대표단을 파리로 파견했다. 국제사회에 한국 민족은 일본의 지배를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전 민족적인 3․1운동은 파리 평화회의에 한국인의 독립 의사를 가장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계획되었다.

뉴욕 월 스트리트의 종전 축하 인파. 찰리 채플린이 더글러스 페어뱅크의 어깨 위에 올라 가 있다.(1918. 11. 11) ⓒ천지일보 2018.11.23
뉴욕 월 스트리트의 종전 축하 인파. 찰리 채플린이 더글러스 페어뱅크의 어깨 위에 올라 가 있다.(1918. 11. 11) ⓒ천지일보 2018.11.23

연합국은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다. 이것이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배경이 되었다. 인류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국제연맹이 출범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평화를 교란하는 국가를 제제할 무력적 수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만주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지 못했다. 세계는 다시 히틀러의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무쏠리니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적 전체주의의 광풍을 맞아야 했고, 우리 민족 또한 일본의 대륙침략과 강제동원이라는 고통의 심연을 통과한 후에 자유와 해방을 맞게 되었다.

중동지역 제 민족들은 영국(트란스요르단, 키프로스, 이라크), 프랑스(시리아, 레바논, 아르메니아)의 위임통치 하에 들어갔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가 임시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위임통치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신탁통치로 바뀌어 해방 후 좌우의 격심한 대립을 가져 오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이상설 선생이 야심차게 추진해왔던 대한광복군정부의 국내 해방계획을 좌절시켰으나, 그 종전은 우리 민족 최고․최대 독립운동인 3.1운동을 촉발시켰다. 올해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일이며, 내년 3월 1일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이다.
 

광화문 기념비전 앞의 시위 군중(대판조일신문. 1919. 03. 03. 야마모토 특파원 촬영) ⓒ천지일보 2018.11.23
광화문 기념비전 앞의 시위 군중(대판조일신문. 1919. 03. 03. 야마모토 특파원 촬영) ⓒ천지일보 201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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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균 2018-11-23 09:47:12
생생한 역사가 느껴집니다 전쟁으로 돌아가신분들도 많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