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시민주권 홍보기획위원장

추석과 추분이 지나고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가 다가오자 도심에도 가을빛이 완연하다. 강원도 등 고산준령에는 벌써 만산홍엽이 한창이라는데 서울 등 대도심의 가로수에도 조금씩 가을색이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 콘크리트로 뒤덮인 삭막한 도심에 그나마 한 가닥 운치를 돋우는 은행나무에도 조금씩 노란빛이 감돌고 있다. 은행나무 가로수는 삼복염천에 큰 잎을 드리워 서늘함을 안겨주는 플라타너스나 느티나무에 비해 별로 눈에 띄지 않다가도 가을에 접어들면 어느 날 샛노란 잎사귀로 도시의 윤기를 더해준다.

그런데 은행잎이 물들 때면 가을의 상념에 젖어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걷다가 기분을 잡치는 상황을 종종 겪곤 한다. 일부 꾼들이 상업적으로 은행을 따기 위해 마구잡이로 은행나무를 털어대는 바람에 아름다운 나뭇잎이 생명을 다하기도 전에 강제로 떨어져 버리거나 나뭇가지마저도 손상을 당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이번 가을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서울 여의도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산보하는데 일군의 사람들이 차량을 이용해 마구잡이로 은행털이를 하고 있었다. 당국의 단속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서둘러 은행을 따는 바람에 애꿎은 나무까지 꺾여져 나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강제로 털린 나뭇잎도 쓰레기처럼 방치된 채였다.

고생대부터 빙하기를 거쳐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어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수형이 아름다운데다 환경오염에 강해 도시의 가로수로 많이 활용된다. 또한 수명이 길기로 유명해 전국 각지에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많이 있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경기도 용문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는 동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로 유명하다.

서울 명륜동에 위치한 성균관대학교 내 문묘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59호)에는 뿌리의 호흡작용을 도와주는 돌기인 유주가 3개나 달려있어 명물로 꼽힌다. 은행나무는 또 재질이 단단하고 목질이 균일해 바둑판, 불상, 가구나 밥상의 재료로 널리 이용된다.

뿐만 아니다. 은행잎에는 진토라이드(Ginkgolide)와 비로바라이드(Bilobalide), 진놀(Ginnol), 프라보놀(Prabonol) 등이 함유돼 있는데 이러한 성분이 말초동맥을 확장시켜 혈류를 좋게 한다. 따라서 뇌의 혈액순환을 향상시키고 산소나 영양 공급을 증가시켜 치매를 개선시킨다고 한다.

혈류개선제인 징코민도 은행잎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열매인 은행은 결핵균의 성장을 억제시키는 효과가 있고 만성기침, 기관지 확장증에도 좋다고 한다. 한마디로 은행은 가로수로써의 용도뿐 아니라 나무와 잎, 열매 모두가 유용한 효자식물인 것이다.

이 같은 장점이 많아서일까. 전국의 웬만한 도시치고 은행나무 가로수가 없는 곳이 없다. 서울시의 경우 가로수 48종 28만여 그루 가운데 은행나무가 42.2%로 가장 많고 미국플라타너스로 불리는 양버즘나무가 32.8%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서울시내 가로수 가운데 거의 절반이 은행나무인 셈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유익한 은행나무가 가을이면 전문적으로 은행을 따는 사람들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사태를 방지할 방법은 없을까?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은행을 따내 수익사업으로 활용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듯싶다.

일부 지자체가 일자리창출 차원에서 은행따기를 활용하고 있는 점은 다행이다. 예를 들면 대구시는 이달 초순부터 중순까지 비영리단체인 대한노인회에 위탁해 은행을 수확 중이다.

대구시는 “은행 열매 낙과로 인한 악취 발생을 방지하고 일부 시민들의 무단 수확으로 인한 수목 훼손 및 안전사고를 예방함과 동시에 지역 어르신들에게 단기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울산시도 은행 따기를 시민들의 체험행사로 시행 중이다. 울산시는 시민들의 신청을 받아 시내 15개 도로변에 있는 은행나무 열매를 채취하는 중이다.

서울시도 이 같은 자치단체의 행사를 벤치마킹해서 일자리 창출과 수익사업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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