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DB 2018.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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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 중재로 교황 방북이 가시화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단으로 꼽히는 천주교. 그러나 중세 천주교의 부패는 극에 달했고, 그 부패의 최정점에 교황이 있었다. 그들의 부패를 95개조 반박문에 써서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오늘날 개신교의 모태가 됐다. 종교개혁 501년이 된 지금 천주교는 얼마나 개혁되고 변화했을까. 천주교의 과거와 현재, 천주교의 부패에 반발해 태동한 개신교의 탄생과정과 실태를 진단한다.

핍박‧순교로 천주교 선교 토대

개항 이후 개신교가 교세 역전

 

경계심 높아져 물리적 충돌도

성당건립‧ 금품강제징수로 마찰

 

비방서 발간하며 교리전쟁까지

해방 후 반공운동 대열에 앞장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1517년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며 유럽에서 불거진 두 종교 간 마찰은 한국에서도 이어졌다. 현재도 천주교와 개신교 보수진영은 관계가 좋지 않다. 특히나 개신교 보수진영에서는 천주교를 이단으로 여기는 등 갈등 속 공존이 이어지고 있다.

◆ 박해와 배교로 시작된 한국 천주교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은 때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천주교 신부들과 교제를 나누며 서양 학문을 접했고, 27세 때 영세를 받았다. 귀국 후 이벽,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에게 전파했지만 동생의 설득으로 배교했다. 정약용도 배교했고, 이벽도 배교했다. 그럼에도 천주교는 확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해교난, 신유교난, 기해교난, 병오교난 등을 통해 박해의 역사를 거듭했다. 특히 흥선대원군 때에는 박해가 극에 달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천주교 신부 페통의 주도 하에 도굴이 된 사실을 보고 받고 박해를 더 심하게 했다. 당시 순교자가 이미 2000명이 넘었고 1870년에는 8000명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천주교에 대한 조선의 박해는 1876년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맺고 개항을 하면서 풀리기 시작해 1886년 한불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사실상 종료됐다.

개신교는 이때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이 선교사로 입국했다. 당시 한반도를 밟은 개신교 선교사들은 경건주의와 복음주의를 기초한 보수주의적 성격을 띄고 청교도적 생활이념을 바탕으로 엄격주의적 성향을 띄었다.

개신교보다 먼저 조선에 자리를 잡은 천주교는 개신교의 적극적인 선교에 위기감을 느꼈고, 이에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자리하게 됐다. 천주교의 견제는 물리적인 마찰로 이어졌고 이는 천주교 신부들, 개신교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관‧민까지 동원한 격렬한 충돌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통된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없었다.

개신교가 유입되면서 천주교의 경계가 시작됐다. 1889년 두세 신부는 블랑 주교에게 편지를 통해 “그들은(프로테스탄트) 교람까지 조직해 그 사람들이 조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성경을 배포하고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며 새 신자들을 가입시키고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천주교에서도 전국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꽁트랑뒤’ 1893년 보고서에서는 전국적으로 카톨릭 신자를 2만 2419명으로 보고했고, 성인 영세자 1724명에 외교인 자녀 영세자도 2045명으로 집계됐다.

◆ ‘총기’ 소지한 천주교 신부 등장

이같은 상황에서 개신교가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미 감리회, 남감리회 등 한반도를 지역으로 구분해 땅나눠먹기식으로 포교를 했다. 비용과 시간과 힘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장로교선교연합공의회가 분할한 지역은 ▲미국 북장로회-경기, 충북, 경북, 황해, 평남, 평북 ▲미국 남장로회-충남, 전북, 전남 ▲호주 장로회-경남 전 지역 ▲캐나다 장로회-함남 북부지역과 함북 전 지역 ▲미 감리회-경기, 충북, 강원, 황해, 평남, 평북 ▲미 남감리회-서울, 송도, 철원, 양구, 이천, 함남의 원산, 회양, 안변을 담당케 했다.

그러나 천주교와 마찰이 발생했다. 이들이 나눈 지역에서 이미 천주교가 포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국적으로 물리적 마찰이 발생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성당건립, 성당 사용, 인력동원, 금품 강제 징수 등의 문제로 분쟁을 일으켰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립은 특히 1900년대 초에 많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종현성당에서 일어난 구타사건, 천주교 비방 기사가 나와 천주교 신자들이 황성신문사에 난입해 개신교인 사장 남궁억을 종현성당에 납치해 위협했던 사건, 황해도 지방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인의 충돌로 외교적 문제로 불거진 ‘해서 교안’ 사건도 있다. 이 외에도 재령군 향내동 사건, 신환포 사건, 자연사건, 수류성당 마부와 개신교인 충돌 사건, 고부 덕촌 충돌사건, 조일관의 폭행사건, 금구 접주리 발포사건 등도 있다. 천주교 페네 신부는 개신교인과 마찰 후 여행시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실제 세 발을 발포해 그 중 한 발은 상대에게 가벼운 총상을 입히기도 했다.

명동성당의 순교자 전시회 작품 중 하나. 조선 후기 박해받던 천주교인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천지일보DB
명동성당의 순교자 전시회 작품 중 하나. 조선 후기 박해받던 천주교인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천지일보DB

◆ 천주교‧개신교 충돌에 교리 전쟁까지

물리적인 충돌 외에도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알리는 호교론서나 교리서 등을 발행해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로를 공격했다. 교리 전쟁이었다.

1906년에서 1907년 사이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는 교세가 역전됐다. 천주교는 개신교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강해졌고, 개신교 비판서인 ‘예수진교사패’를 발행했다. 이 책에서 천주교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개신교를 열교로 표현했다. 특히 개신교를 루터와 칼빈에 의해 세워진 거짓 예수교라고 비판하면서 천주교의 오랜 역사를 자랑했다. ‘랑교명증문답’에서는 루터의 부모가 가진 종교가 로마 가톨릭이라는 점을 들어 루터가 개신교를 세운 이유에 대해 ‘교오와 질투로서’ 그렇게 됐다고 표현했다. 특히 천주교는 이 책에서 칼빈에 대해 그 행실이 루터보다 반배나 더 고약하고 여러 가지 드러운 사욕에 빠지고 인성을 크게 거스린 사람으로 평가했다. 천주교는 ‘신교지기원’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 사건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반면 개신교도 만만찮았다. 개신교는 ‘예수텬쥬량교변론’을 내고 천주교가 ‘예적 본교회’의 모습을 벗어난 종교이며, 개신교는 본래의 ‘예적 본교회’의 모습을 회복한 교회라고 표현했다. 또 ‘누터개교긔락’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 ‘진리의 회복’이라고 설명하는 등 팽팽하게 맞섰다.

초기 천주교와 개신교의 이러한 악연은 일제강점기 때 잠시 주춤한다. 두 종교 모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선교사 추방과 감금, 신학교 폐교 등을 겪었다. 특히 천주교는 일제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고 재빠르게 신사참배를 했다. 이들은 해방 후에도 이에 대해 회개를 하지 않았다.

천주교는 1920년대부터 반공주의를 강화해나갔고, 1930년대에는 반공을 가장 주요한 목표중 하나로 삼은 ‘가톨릭 액션’을 소개했다. 해방 후 한국 천주교의 사업은 대부분 외국의 원조로 이뤄졌다.

2011년 발표된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신정호의 석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남한 지역의 천주교회는 미군정청 아래서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천주교는 교구장을 한국화했고, 미군정과의 관계를 지속했다. 특히 메리놀회 소속 미국인 선교사들은 미군정 당국과 한국교회의 협력적 관계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남한 지역 천주교는 당시 한국의 우익 정치 세력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그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한국민주당(한민당)’에는 천주교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제2공화국의 지도자가 된 장면은 천주교 서울교구의 적극적인 권유를 통해 정치계에 입문했고, 이승만은 1948년 5.10 선거에서 자신의 선거구를 장면에게 양보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승만과 천주교회 사이에 철저한 밀월관계가 형성됐다고 봤다. 반공을 표방한 천주교회는 보수 세력과 동선을 함께 했다.

◆ 반공운동으로 자리 잡은 천주교

특히 교황을 대신해 한국에 파견됐던 번 주교는 부임 직후인 1947년 10월 천주교청년연합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반공운동을 장려했다. 번 주교는 같은 해 8월 12일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됐다.

특이한 것은 번 주교가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2014년 선정 학술연구교수지원사업에 선정돼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가 조사해 발표한 ‘1950~1960년대 국제적 냉전 소용돌이 속의 한국 천주교회’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번 주교는 한국에 오기 앞서 일본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했다. 번 주교는 일본이 펼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유화적인 정책을 지지했으며, 침략 전쟁을 일으킨 천황제의 온존도 적극 지원했다. 한국에서 격렬한 반공입장을 보였던 것과 매우 대조된다. 번 주교의 행태는 신앙적인 기조가 아닌 각 국가의 정치적인 흐름에 따라 뒤바뀐 것으로 분석된다.

번 주교의 활동은 이승만에게 큰 힘이 됐다. 이승만의 비밀서한에서 그는 스펠만 추기경과 번 주교를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고 하며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번 주교는 공산당으로부터 교황사절관이 약탈당하고 상황이 악화하자 명동 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다. 1950년 7월 11일 명동에서 체포된 번 주교는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7월 19일 평양으로 이송돼 감옥에 갇혔다. 10월 8일에는 만포군(현 자강도 만포시)으로 이송됐다. 11월 7일 중강진 부근 하창리(현 평안북도 구성시 남창동) 수용소로 가던 중 병고로 죽음을 맞아 ‘죽음의 행진’이란 말이 생겨났다. 그는 11월 25일 62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휴전 후 북한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전개하던 미국 메리놀회의 선교사들이 남한에 자리 잡으면서 천주교회의 입지는 강화됐다. 미국 정부와 천주교의 물적 인적 후원을 배경으로 구호활동과 선교활동에 나섰고, 정치적으로도 비종을 갖게 됐다.

특히 천주교회는 미국의 가톨릭구제회(NCWC)를 중심으로 북한 지역출신의 피난민(군인과 민간인)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고, 이는 이승만 정권과 갈등을 빚는 큰 요인이 됐다.

지도층과 관계가 좋았던 천주교는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이승만은 천주교의 대표잡지인 ‘경향잡지’를 폐간 시켰고, 법무부 장관을 교황청에 보내 당시 노기남 주교의 해임을 요청했다. 이승만과 한국천주교회는 극도로 대립했다. 그러나 이후 천주교는 소수 단체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정권에 정책에 순응하며 한국사회에 자리잡았다.

한편 천주교와 개신교의 초기 대립은 현재 개신교 보수진영과 천주교의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 개신교 진보진영에서는 교단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통해 가톨릭과 일치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보수진영에서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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