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남반북이(南潘北李)
[고전 속 정치이야기] 남반북이(南潘北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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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선종화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어서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진수를 느낄 수 있다. 제백석(齊白石, 1864~1957)의 제자였던 이고선(李苦禪)은 원명이 이영(李英)이고, 호를 려공(勵公)이라 했던 당대의 걸출한 화조(花鳥) 화가이자 서예가였으며, 미술교육가였다. 그는 1899년 1월 11일 산동성 고당현(高唐縣) 이기장(李奇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 민간에서 회화가의 영향을 받아 입문을 한 이래, 예술가로서의 험난한 길을 걸었다. 1919년 북경대학 부설 업여화법연구회(業餘畵法硏究會)에 가입해 서비홍(徐悲鴻)으로부터 소묘(素描)와 서양화를 배웠으며, 1922년 북경국립예전에서 서양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인력거를 끌면서 생활을 유지했다. 그의 이름인 ‘고선’은 동학이었던 임일로(林日盧)가 붙여준 것이다. ‘고(苦)’는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이고, ‘선(禪)’은 사의화(寫意畵) 즉 사물의 형식보다 그 내용이나 정신을 그리는 화법을 고대에는 선종화(禪宗畵)라 불렀기 때문에 이고선 작품의 특징을 지칭한다. 

1923년에는 제백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당시의 제백석은 아직 이름을 크게 얻지 못했다. 북경의 화단은 옛것을 모방하는 풍조가 횡행하고 있었지만, 유독 제백석은 그와는 별개로 대담하고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고 있었다. 국공내전 초기에 북경이 함락되자 이고선은 전문(前門)의 노야묘(老爺廟)와 서성(西城)의 유수정(柳樹井) 2호에 은거했다. 평소에 공산당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탓으로 1946년에 북경국립예전에서 중국화를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1949년 북경이 공산당의 수중으로 들어오자 겸임교수가 됐던 그는 1950년 모택동(毛澤東)에게 글을 써서 자신의 일을 처리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모택동은 즉시 서비홍 원장에게 서신을 보내고 그의 의사를 타진한 다음, 이고선을 중앙미술학원 부설 민족미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나중에 그는 이 학원의 중국화과 사의화 교수가 됐다.

1972년 주은래(周恩來)가 이고선에게 사람을 보내서 작품을 맡아달라고 하자 그는 기꺼이 응했다. 그는 3년 동안 나라에서 필요한 그림 300여 폭을 그렸다. 1981년 중국화조화, 고선화응(苦禪畵鷹)은 과학교과서에 실렸으며, 고선사의(苦禪寫意)는 영화로 제작돼 후손에게 남겨졌다. 그동안 창작된 큰 폭의 묵죽도와 성하도(盛夏圖)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1983년 봄에는 이고선 교수가 교육에 종사한 60년을 기리는 기념식이 있었다. 그 해 6월 8일에는 일본의 나가사끼(長崎)에 있는 공자묘에 ‘지성오역택천하(至聖五域澤天下), 성덕유범수인간(聖德有範垂人間)’이라는 커다란 대련을 남기기도 했다. 이고선 선생은 1983년 6월 11일 새벽 1시에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생전에 화조화와 사의화에 정통했으며, 새와 매 그리고 연꽃을 즐겨 그렸다. 중국화단에서는 ‘남반북이(南潘北李)’라는 칭호가 있다. 오창석(吳昌碩)의 제자였던 강남의 반천수(潘天壽, 1897~1971)와 강북의 이고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고선은 제백석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스승의 뜻을 이은 학생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반드시 먼저 인격부터 닦아야 한다. 품격이 없는 사람은 그 행동이 오래 가지 못한다. 그림에도 품격이 없으면, 붓을 어디로 놀려야 할지를 모른다.”

작품과 인격의 결합을 중시한 선종화 대가의 말은 곱씹을수록 새롭다. 바이두에서 이고선과 반천수의 작품을 검색해 구경하느라고 가을밤이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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