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대한민국 역사와 밀접한 국제연합(UN)의 역사
[이정은 박사의 역사이야기] 대한민국 역사와 밀접한 국제연합(UN)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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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유엔창립총회가 열렸던 샌프란시스코 패어몬트 호텔(The Fairmont Hotel, San Francisco) ⓒ천지일보 2018.11.8
유엔창립총회가 열렸던 샌프란시스코 패어몬트 호텔(The Fairmont Hotel, San Francisco) ⓒ천지일보 2018.11.8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이란 말은 1942년 1월 1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한 ‘국제연합에 의한 선언’에서 처음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주축국(독일, 이태리, 일본)에 대항하여 26개 나라가 함께 계속 투쟁할 것을 촉구한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 약 4년 후인 1945년 10월 24일 공식 창립되었다.

국제기구들의 탄생
국가 간 특정문제 협력을 위한 국제기구는 1865년 파리에서 창립된 국제전기통신연합(ITU, The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이 처음이었다. 그 후 1874년 만국우편연합(UPU, Universal Postal Union)이 창설되었다. 두 조직은 1947년 유엔 창설 이후 산하 특별 기구가 되었다. 1899년 국제적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전쟁 방지 및 전쟁에 관한 국제적인 규칙을 제정하기 위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국제회의와 중재재판소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후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특사가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인 1907년 제2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그 이후 복잡한 국제정세와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만국평화회의는 열리지 못했다.

국제연맹
제1차 세계대전의 유례없는 재앙을 경험한 후인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국제연맹이 창설되었다. 국제노동기구(ILO)도 이때 국제연맹 산하에 설립되었다. 국제연맹은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을 제재하지 못했고, 궁극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지 못하여 실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었던 1941년 6월 12일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영국 런던에 망명정부를 두고 있었던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드골 장군의 자유 프랑스 등 9개국 대표가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 모여 성명을 발표했다.

“항구적인 평화의 유일하고 참된 기초는 침략의 위협에서 벗어나 있는 세계의 자유 국민들이 모든 사람이 경제적, 사회적 안전을 누릴 수 있도록 기꺼이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쟁 중이거나 평화를 누리고 있는 모든 자유민들과 함께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입니다.”

그 시기 영국은 22개월째 전쟁의 와중에 있어 런던은 수시로 공습을 받았으며, 공해상의 선박들은 독일 잠수함의 공격에 위협받고 있었다. 연합국 정부와 국민들은 침략국에 대해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우리는 단지 또 다른 전쟁의 두려움 속에서 살기 위해 승리할 것인가? 전쟁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없앨 수는 없을까?’하는 질문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1941년 8월 14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이 대서양의 미국 전함 U.S.S. 오거스타(Augusta) 함상에서 만나 ‘대서양 헌장’으로 알려진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회담에서 ‘세계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국제기구 창설을 위한 논의가 있었다. 미국은 아직 참전하기 전이었다.
 

대서양 헌장을 위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USS 오그스타 함상에서 회담하는 광경(1941. 8. 14) ⓒ천지일보 2018.11.8
대서양 헌장을 위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USS 오그스타 함상에서 회담하는 광경(1941. 8. 14) ⓒ천지일보 2018.11.8

대서양 헌장의 8개 조항 중 제6조에서 “자국 국경 내에서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제 7조에서 “공해상에서 자유로운 항해”를 천명하고, 마지막 8번째 조항에서 “무력사용의 포기”를 통해 평화기구의 윤곽을 제시했다. 다른 조항들에서는 국제 정의의 기본 원칙으로서 침략금지, 관계국 국민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동의 없는 국경 변경 금지, 모든 국민들이 자국의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 자원에 대한 모든 국가에 공평한 접근이 천명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의 대서양 헌장은 식민지하 약소민족이나 피점령국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다. 처칠은 돌아와 런던에서 영국과 소련,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 10국 대표회의를 열어 대서양 헌장에 지지 서명을 하게 했다.

1942년 1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막심 리트비노프, 중국의 숭체벤(宋子文)이 ‘UN에 의한 선언’으로 알려지게 된 짧은 문서에 서명했다. 이 문서는 서명국 정부들이 최대의 전쟁 노력을 약속하며, 평화를 위한 개별행동을 금지했다. 다음날 22개국 대표들이 서명을 추가했다.

1943년 10월 30일 미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 소련의 몰로코프(Vyachs Molotov), 영국의 에덴(Anthony Eden) 등 3대 강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1943년까지 연합국이 완전한 승리를 가져올 것과 그 후 “모든 나라 사람들이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선언했다. 또한 안보와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의 설립 필요성을 재확인했다. 중국대표도 모스크바 3상 회의 선언에 참여했다. 4대 강국 외상의 선언이 있은 지 2달 후인 1943년 12월 1일 루즈벨트, 스탈린, 처칠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만나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한 노력을 다시 결의하여, 크고 작은 나라들이 참여하는 국제평화를 위한 기구 설립의 필요성을 다시 천명했다.
 

국제연합 설립 준비를 위한 덤버턴 오크스 회담 광경(1944. 10. 7) ⓒ천지일보 2018.11.8
국제연합 설립 준비를 위한 덤버턴 오크스 회담 광경(1944. 10. 7) ⓒ천지일보 2018.11.8

1944년 10월 7일 덤바튼 오크스 회의
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예비회담으로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대표들이 1944년 8월 21일부터 10월 7일까지 워싱턴 D.C. 조지타운의 덤버턴 오크스(Dumbarton Oaks)라는 한 저택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모든 회원국들로 구성되는 총회와 5개 강대국이 상임이사국이 되고, 2년 임기의 6개국 비상임 이사국으로 구성되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국제사법재판소 그리고 사무국의 4개 조직으로 기구안이 합의되었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문제, 소연방 내 공화국들의 회원 자격,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대신할 신탁통치제도 등은 합의를 보지 못했다.

유엔조직의 핵심은 미래의 전쟁 예방책임을 안전보장이사회에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회원국들은 전쟁을 예방하고 침략 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군대를 배치하게 되었다. 국제연맹이 실패한 것은 평화유지를 위한 무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덤바튼 오크스 제안은 각국에서 국제연맹에 비해 큰 진전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문제, 신탁통치 문제 등에 대해서는 결정이 나지 않았다. 이들 미해결 쟁점들은 1945년 2월 11일 흑해 크림반도 얄타에서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등 수뇌들과 각국 외무장관 및 참모총장들이 모여 최종 타결을 보았다. 3국 지도자들은 “우리는 해결했습니다,”고 하며 “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대회를 1945년 4월 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다”고 발표했다.

얄타회담 광경. 국제연합 설립에 가로놓인 쟁점을 타결하고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소집했다.(1945. 2. 11) ⓒ천지일보 2018.11.8
얄타회담 광경. 국제연합 설립에 가로놓인 쟁점을 타결하고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소집했다.(1945. 2. 11) ⓒ천지일보 2018.11.8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
독일과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유엔 선언에 동의한 46개국 대표가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초청되었다. 그 이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덴마크와 아르헨티나 4개국이 추가로 초대되어 모두 50개국이 되었다. 이들 50개국은 세계 인구의 80% 이상을 대표하여 모든 인종, 종교 그리고 대륙의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고 도움을 주는 기구를 만들기로 결의했다.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각국 대표들로 구성된 ‘토론 위원회’와 그중 14명의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권고안 준비 작업을 했다.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신탁통치에 관해 많은 논쟁 끝에 신탁통치의 목적은 해당 국민의 독립 또는 자치를 지향하도록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토론의 가장 많은 부분은 미국,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의 5대 강국이 안전보장이사회 거부권을 갖는 문제였다. 작은 나라들은 상임이사국 권한을 축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5대 강대국은 세계평화를 위한 주된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며 거부권을 계속 주장했다. 결국 국제연합의 무사 창설을 위해 작은 나라들이 양보하였다.

1945년 6월 25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서 각국 대표단 총회를 열고 유엔헌장 초안을 표결에 부쳤다. 모든 참석자가 기립으로 의사를 표시하게 했다. 유엔헌장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다음날 샌프란시스코 재향군인기념관 대강당에서 50개국 대표단이 국제사법재판소 헌장과 국제연합 헌장에 각각 서명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는 주축국의 첫 공격의 대상이 된 중국 대표가 가장 먼저 서명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 사이에 사망하여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트루먼 대통령이 마지막 총회 연설을 하면서 “방금 서명한 것이 국제연합 헌장”이며 “우리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기구”라고 말했다.

유엔헌장은 각 나라 국회 비준을 거쳐 이를 미국정부에 통보했을 때 헌장이 효력을 발휘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945년 10월 24일에 마침내 4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평화와 정의,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국제연합이 탄생했다.

오늘날 유엔 회원국은 193개국이며 한국과 북한은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총회에서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했다.

UN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두 달여 지난 1945년 10월 24일 창설돼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감독하며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정 수립에 관여했으며, 2년 뒤 일어난 6.25전쟁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의해 16개국의 국제연합군을 파견하여 괴멸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출하였다. 그 후 급속한 경제 성장과 국력 신장에 힘입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다. 오늘날 북한 핵문제로 인하여 대북한 제재가 또한 유엔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UN은 창설 이래 지금까지 대한민국 역사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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