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난세에 또 다른 축의 최명길(주화파)과 달리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청과 항전할 것을 굽히지 않았던 주전파의 대부 김상헌이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읊은 시조다.

시대는 달라도 선조와 광해 그리고 인조의 정치외교사를 통해 오늘날 처해 있는 현실을 조명해 볼 수도 있다. 사색당파 즉, 동인과 서인, 남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던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치욕을 겪어야 했고, 이를 지켜본 광해는 선조가 걸었던 그 길을 걷지 않기 위해 또 다른 파벌 즉, 북인을 등에 업고 당시 ‘대명천지(大明天地)’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대단했던 명나라(한족, 漢族)와 명나라를 공격할 정도로 세력을 넓혀 가고 있던 후금(여진족, 훗날 청)과의 사이에서 백성과 나라를 보전키 위해 소위 ‘등거리 외교(실리외교)’를 펼치며 후일을 기약했다. 그리고 이에 불만을 가졌던 서인들은 인조반정이라 하듯 인조를 앞세워 반정을 일으켜 광해를 축출하고 후금(청) 대신 기울어가는 명과 손을 잡으며 소위 ‘친명배금정책’을 노골화함으로써 정묘·병자호란이라는 임진왜란 버금가는 치욕사를 또다시 나라와 백성에게 안겨줬으니 우리 눈앞에 우뚝 솟아 늘 보이는 ‘남한산성’이 그 치욕의 현장이며 증거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에 와 볼 때, 김상헌의 충절은 충절의 아이콘이라는 긍정에서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중의 화두를 낳으며 후대는 김상헌에 대한 평가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변화는 있어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글귀다. 즉, 정부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철학은 시대가 변한다 해도 변할 수 없는 진리다. 하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정부가 취해야 할 자세와 방법은 시대의 변천과 환경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돼 가야 한다는 또 다른 진리를 생각해 봐야 한다.

반면교사라 하듯, 이처럼 치욕의 역사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면 들여다봐야 한다. 지도자의 지도력 부재, 당리당략에 함몰되고 파벌에 편승해 나라와 국민을 볼모로 잡고 있고,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라는 입에 발린 소리는 끊이지 않으며, 맞고 틀리고의 개념은 내 편과 네 편이란 상대적 개념으로 변질돼 그 때의 사색당파의 그 혼령들이 오늘 우리 앞에 되살아나 있는 듯하다. ‘초록은 동색’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했던가. 누가 누구를 힐난할 수 있겠는가. 정치가 아무리 권력 잡는 게 목적이라지만 상식이 있고 도(道)가 있고 원칙이 있고 나라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을 당하면서도 권력을 잡는 게 정치라는 얘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되돌아가 보자. 광해는 왜 줏대 없이 등거리 외교를 펼쳤는가. 그야말로 줏대가 없어 그랬을까. 그의 중심에는 나라와 백성이 있었을 것이다. 강대국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힘이 있어야 나라와 백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그 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실리외교라 하는 것이다. 의리와 명분보다 실리 말이다. 이 실리는 곧 나라와 백성인 것이다. 이것이 지도자가 한시라도 잊고 있어서는 안 될 최고의 덕목인 것이다. 나라가 없는 백성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백성 없는 나라 나아가 군주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시 정리하자면 자신의 명예와 고집과 아집과 명분과 명예와 치적이 아닌 나라와 국민이라는 실리 말이다.

지금 한반도는 한반도의 문제며 우리의 문제라면 틀린 말이 아니다. 숲을 보고 나무를 보라는 말처럼,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한반도 문제는 근시안이 아닌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치욕의 역사를 통해 살펴봤듯이 그 때나 지금이나 한반도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며 더 나아가 이 한반도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세계의 이권이 함수관계로 얽혀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문제 나아가 남북의 문제니 우리 맘대로 하면 된다는 뼈 속 깊이 자리 잡은 폐쇄적 의식이 근시안적 사고를 만들고 다른 견해를 말하면 평화와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국민총화와 협치를 스스로 깨트리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에 오히려 걸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 문제를 우리가 풀어야 한다는 논리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한 일이며, 광해의 정치외교사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실타래같이 얽혀있는 한반도 주변정세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고집과 당리당략과 치적이 아닌 국민의 중지를 모아 국민 총화로 만들어갈 때 그 어떤 세력도 반대할 명분이 없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과 북의 평화통일은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분명한 로드맵을 국민 앞에 제시하고 지지를 얻어 진행해 나가야 한다. 무조건 통일과 평화는 절대 금물이다. 무조건 평화와 통일이 아니며, 자유 시장 원리에 의한 경제 질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이념이 그 근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마치 진리와 다르지 않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평화와 통일에 의구심을 갖는 이유는 이 같은 방향성이 불분명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평화는 평화논리로, 경제는 경제논리로 풀어가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매사를 두루뭉술 모호하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국민들을 기망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봐진다는 우려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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