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위치한 백호문학관. 한적한 시골마을 나주임씨 대종가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8.11.5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위치한 백호문학관. 한적한 시골마을 나주임씨 대종가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8.11.5

백호 임제 선생 39세 짧은 생

1000수의 시 인생사 고스란히
청년·중년·말년 대표 시 소개
임제 친필 현판·시 쓰기 체험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가을이 끝자락을 향해 서서히 가고 있는 지난 2일 억새 가득한 영산강변을 따라 호남 대표 한시(漢詩)인이자 소설가인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을 찾았다.

39세의 짧은 생을 살았으나 삶의 고뇌와 빼어난 정신을 1000여수의 시와 산문, 소설로 남겨 16세기 조선에서 가장 개성적이며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는 백호 임제. 그가 전하는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있는 백호문학관을 찾았다.

한적한 시골 마을 나주임씨 대종가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백호문학관을 들어서니 임제 선생이 황진이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 ‘청초 우거진 골에’가 눈에 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로 끝나는 시를 읊조리니 백호 임제가 어떤 인물이었나 궁금해진다.

자료에 따르면 임제(1549~1587)의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벽산(碧山), 소치(嘯癡), 겸재(謙齎) 등이 있는데 백호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호 임제는 기질이 호방하고 예속에 구속받지 않았으며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지녀 풍류기남아(風流奇男兒)라고도 일컬어졌다.

임제는 나주 임씨(林氏)로 고려 충렬왕 때 보좌이등공신에 책록된 임비(林庇)가 시조다. 임비의 9세손 임탁이 고려 말 해남감무로 있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회진(會津)으로 낙향하면서 본관을 회진으로 했다. 이후 회진이 나주에 속하게 되자 본관을 나주로 고친 것으로 알려졌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백호문학관 상설전시관에 나주 임씨 종가가 기증한 미공개 백호의 친필시가 전시돼 있다. ⓒ천지일보 2018.11.5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백호문학관 상설전시관에 나주 임씨 종가가 기증한 미공개 백호의 친필시가 전시돼 있다. ⓒ천지일보 2018.11.5

백호문학관은 임제의 대표 시를 청년기, 중년기, 말년기로 나눠 차례대로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선 문중이 기증한 임제의 친필을 만날 수 있다. 백호 임제의 친필 현판 도장 찍기 체험 공간과 어사를 쓰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있다.

백호문학관 상설전시관에 들어서자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라는 ‘이 사람有人’의 시구가 기자를 먼저 맞이한다. 조선시대 풍류 문학의 세계로 안내할 터이니 세상 고민은 잠시 내려놓으라는 것만 같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상설전시관에는 백호 임제의 초상화(추정)를 비롯한 연보, 가계도, 임제의 벗,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전시실 한쪽에는 임제의 시를 만날 수 있는 영상이 설치돼 있는데 아이패드에 있는 시 제목을 터치하면 임제의 시가 낭송된다. 그의 작품 중 나주천(나주 중앙로에 있는 개천 다리)을 배경으로 쓴 ‘금성곡’을 잠시 감상해본다.

‘금성의 아가씨들이 학다리 가에서, 버들가지 곱게 꺾어 임에게 드린다네, 해마다 봄이 오면 이별이 서러운데, 월정봉은 높고, 영산강 물은 길게 흘러만 가네’라는 시를 듣고 있으니 잠시 몇백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하다. 나주천의 모습이 떠오르고 나주인이라면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시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백호문학관 상설전시관에 현판 도장 찍기, 어사 쓰고 사진 찍기 등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천지일보 2018.11.5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백호문학관 상설전시관에 현판 도장 찍기, 어사 쓰고 사진 찍기 등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천지일보 2018.11.5

일반인이나 학생들에겐 한시가 어렵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백호문학관을 찾으면 한글로 이해하기 쉽게 기록됐을 뿐만 아니라 낭송까지 해주니 한시의 매력에 금세 빠질 것 같다.

기획전시실에는 최근 ‘웃음’을 주제로 열었던 백호 임제 어린이 글짓기대회 수상작 시화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화전을 감상하고 있으니 ‘웃음’이란 주제 때문인지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관계자에 따르면 백호문학관에서는 백호 임제 어린이 글짓기 대회, 문중 기증 고문서 해석·복제 및 문화재 등록 추진, 초등학생 대상 백호 임제 어사화 만들기, 중학생 대상 자유학기제 연계 진로체험프로그램, 문화가 있는 날 가족체험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지난 2일 전남 나주시 다시면 백호문학관 2층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영산강. 푸른 강물에 햇빛이 반짝이고 있다. ⓒ천지일보 2018.11.5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지난 2일 전남 나주시 다시면 백호문학관 2층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영산강. 푸른 강물에 햇빛이 반짝이고 있다. ⓒ천지일보 2018.11.5

시화전 감상 후 2층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펼쳐져 영산강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시집 한 권만 있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유유자적하며 마음껏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백호문학관 1층은 백호 임제의 문학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 조성돼 있다. 이곳에는 문중이 기증한 고문서와 임제와 관련된 책이 비치돼 있다.

백호문학관 관계자는 문학관 주변에 나주 임씨 대종가, 백호 임제가 어릴 적 공부하던 문중 정자 영모정 등을 들러보길 추천했다. 백호문학관을 나서자 문학관 옆에 조선 관리로서 임제의 성정을 알게 하는 ‘물곡비(勿哭碑)’와 그의 청년 시절의 성정을 알 수 있는 ‘무어별(無語別)’이란 시가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백호의 무어별 ‘수줍어서 말 못 하고’라는 시를 써 본다.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수줍어서 말 못 하고 이별이러니 돌아와 겹문을 꼭꼭 닫고선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라는 시를 따라 읊조려보며 백호문학관을 나섰다.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백호문학관 야외 조형물에 ‘무어별(無語別)’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천지일보 2018.11.5
[천지일보 나주=이영지 기자] 전남 나주시 백호문학관 야외 조형물에 ‘무어별(無語別)’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천지일보 201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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