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려사회는 성리학이 이념으로 자리 잡기 전에는 남녀 관계가 비교적 자유스러웠다. 가요 가운데 병든 남편을 집에 두고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을 개탄한 노래도 있지만 ‘쌍화점(雙花店)’은 조선 어우동을 방불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연애관을 노래한 것이다. 

우란분회(盂蘭盆會)는 석가탄신일이나 7월 백중 때 사암(寺庵)에 난을 바치며 예불하는 풍속이었다. 그런데 이 축제가 탈선의 장이 됐다. 추문이 꼬리를 물자 공민왕은 어명으로 부녀자들이 사암에 가는 것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유교사회에서 사대부의 이혼은 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몰락한 양반이 아내를 부정의 대가로 몇 푼을 받고는 이혼합의서를 써준 일도 있었다.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이 사료는 유교사회 이면의 반윤리적 풍속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최덕현이라는 선비는 매우 가난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부인이 그 마을 지체 높은 사람과 눈이 맞은 것을 들켰다. 최덕현과 간통한 두 사람 사이에 합의서가 작성됐다. 아내를 잃은 남자는 다음과 같이 증빙서를 써 주었다. 

“아내는 그간 나와 함께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동고동락하였는데 이제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갔으니 슬프도다. 아내와 낳은 두 딸은 장차 누굴 의지하여 자라야 하나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 그녀가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칼로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앞날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엽전 35냥을 받는 걸로 영원히 우리의 혼인 관계를 파하고 위 댁(宅)으로 보낸다. 뒷날 이 일과 관련하여 문제가 생기면 이 수기를 가지고 증빙할 일이다.”

그러나 병들고 가난한 남편을 모두 버린 사회는 아니었다. 사회적 정의는 그래도 정절(貞節)이었다. 조선 후기 함양에 살던 아전 박모의 딸은 부모가 혼처를 정해 주었다. 그런데 신랑이 준수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폐병을 앓고 있었다. 뒤늦게 사위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안 아전은 파혼하고 딸을 다른 데로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딸은 한번 정해 준 지아비를 버릴 수 없다고 병든 신랑을 택하고 말았다. 얼마 후 초야도 치르지 못한 신랑이 죽자 신부도 따라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의 ‘열녀조(烈女操)’를 방불한다고 치하했다. 열녀조는 지아비를 따르는 아내의 의리를 노래한 것이다. 

- ‘오동은 서로 기대어 늙어 가고/ 원앙은 나란히 죽는답니다/ 정숙한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귀히 여기니/ 죽고 사는 것이 또한 이들과 같지요(梧桐相待老 鴛鴦會雙死 貞婦貴殉夫 死生亦如此)’ … -

해동가요 속에는 병든 남편을 위해 화채를 만들어주려고 머리를 잘라 시장에 판 한 아내의 눈물겨운 사랑가가 있다. 여러 과일을 사들고 집에 들어와 보니 오색사탕이 빠진 것을 한탄한다.

- 서방님 병들어 두고 먹일 것이 없어/ 종루 시장에 다리를 팔아/ 배 사고, 감 사고, 유자 사고, 석류를 샀다/ 아차차 잊었구나. 오색 사탕을 잊었구나/ 수박에 숟가락 꽂아 놓고 한숨지어 하노라 - 

상대가 병들고 몰락하면 쉽게 버리는 몰인정한 현대사회에서 헌신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커플들도 있다. 대장암으로 사경을 헤맸던 한 인기 개그맨을 사랑하여 결혼식을 올린 신부가 화제가 되고 있다. 

개그맨은 다음과 같은 글을 인스타그램에 실었다. ‘수술하는 내내 울며 기도해준 사람. 항암에 고통 받고 짜증 낼 때에도 모든 걸 웃으며 받아준 사람. 나보다 더 아파하고 슬퍼한 사람… 이 귀하고 큰 마음을 받은 저는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착한 신부의 헌신적 사랑이 가슴에 짠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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