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나라 중국. 그 드넓은 땅 동쪽 끝인 동북지역의 작고 작은 마을에 큰 기운이 솟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땅은 청태조 누르하치가 태어난 곳이자, 그 아들과 함께 중국 천하를 제패할 꿈을 키운 장소다. 누르하치가 속한 ‘여진족’은 이곳에서 새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여진은 ‘조선’과도 관련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를 중국 동북 현지  답사를 통해 하나씩 풀어가 보고자 한다.

청태조 누르하치 동상, 누르하치에 대한 소개가 간단히 기록돼 있다. ⓒ천지일보 2018.11.4
청태조 누르하치 동상, 누르하치에 대한 소개가 간단히 기록돼 있다. ⓒ천지일보 2018.11.4

명과 후금과의 4일의 전투

유명한 중국 전쟁사로 꼽혀

주력부대 집중해 명군 격파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이 어울린다고 할까. 후금(훗날 청나라)의 수도인 허투알라의 서쪽이자 무순의 동쪽에 위치한 사르후(薩爾滸). 1619년 3월 1일 10만명의 명나라 군대(조선군 포함)는 후금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그 숫자에 놀랐을 법도 한데, 청태조 누르하치는 오히려 팔기군과 함께 명군을 맞이하고 있었다.

후금의 총병력은 고작 6만명. 수치상으로 열세였다. 그러나 뛰어난 전략가였던 누르하치는 주력부대를 집중해 사르후에서 명군을 각개격파해 나갔다.

‘살이호풍경명승구(萨尓浒风景名胜区)’라고 적힌 ⓒ천지일보 2018.11.4
‘살이호풍경명승구(萨尓浒风景名胜区)’라고 적힌 ⓒ천지일보 2018.11.4

사르후 전투는 중국의 전쟁사 중 유명한 사례로 꼽힌다. 명나라와 후금의 단 4일간의 전투. 국운을 건 전투는 뜨는 태양 후금과 지는 태양 명나라로 운명을 갈랐다. 이 전투로 후금은 날개를 달고 만주를 차지해나갔다.

역사적 장소를 관람하기 위함일까. 10월 1일 오전 주차장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붐볐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중국인의 국경절을 절로 실감캐 했다. 사르후 전투 적전지를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상했다. 안내도를 확인하니 ‘살이호풍경명승구(萨尓浒风景名胜区)’라고 적혀 있었다. 지명은 분명 사르후가 맞지만 호수와 울창한 살림만 가득했다.

사르후 전투가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장소가 호수에 잠겨있다. 멀리 호수가 보인다. ⓒ천지일보 2018.11.4
사르후 전투가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장소가 호수에 잠겨있다. 멀리 호수가 보인다. ⓒ천지일보 2018.11.4

넓은 벌판이 아닌 이런 곳에서 10만명의 명나라 군대와 6만명이 싸웠을 리 없다. 알고 보니 1958년에 농업용수를 위해 대화방저수지(大伙房水库)가 만들어졌다. 사르후 적전지는 이미 물에 잠긴 것이다. 동시에 호수 주위로 관광지가 개발됐다. 결국 호수를 돌며 전투의 흔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언덕 정상에는 ‘사르후산지전 서사비(薩爾滸山之戰書事碑)’가 있었다. 이 비석은 1776년 건륭제가 세운 것으로 원본은 심양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인근에는 누르하치의 외조부인 왕고(王杲)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누르하치 동상도 발견할 수 있는데, 전투의 승자처럼 늠름한 모습이었다. 동상 아래에 있는 표지석에는 누르하치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기록돼 있다.

사르후 전투지 안내도 ⓒ천지일보 2018.11.4
사르후 전투지 안내도 ⓒ천지일보 2018.11.4

누르하치의 성은 ‘아이신기오로’인데, 이 성은 우리 민족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는 “‘아이신기오로’에서 ‘아이신’은 쇠, 금(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신라 김씨의 후손임을 뜻한다”라며 “나아가 후금의 누르하치가 속한 여진족도 ‘조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12세기 초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자신의 가문이 신라의 후손이라고 했다. 이는 금을 계승해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 가문에도 신라 계승의식이 전승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고려사’는 물론 중국 문헌인 ‘이역지(異域志)’와 ‘신록기(神麓記)’ 등에도 금나라의 시조를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고 기술했다. 1777년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건륭제 시절은 만주 황실의 뿌리 의식이 점차 퇴화될 시점인데도 신라와 연관 지었다는 것을 본다면 누르하치 시절에 신라 계승 의식은 더욱 컸을 것으로 보인다.서 역사 칼럼니스트는 “우리 역사를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이들과의 연관성이 달라진다”며 “여진족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작은 연결고리의 중요성을 인정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누르하치 외할아버지 왕고 동상ⓒ천지일보 2018.11.4
누르하치 외할아버지 왕고 동상ⓒ천지일보 2018.11.4

또 다른 학자도 금나라와 신라의 관계에 주목했다. 심백강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는 “신라 출신 김한보가 여진으로 갔고, 그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것”이라며 “고려사에 보면, 금나라 초기 왕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역사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나 식민사관을 계승한 뒤에 잘못된 역사학자들이 초라한 한민족의 역사만 선택해서 기록하기에 중요한 역사가 묻히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언덕 정상에 있는 ‘사르후산지전 서사비’. 사르후 전투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담겨 있다. ⓒ천지일보 2018.11.4
언덕 정상에 있는 ‘사르후산지전 서사비’. 사르후 전투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담겨 있다. ⓒ천지일보 201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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