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지난달 30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결정으로 마무리 됐다. 소송을 시작한 2005년 이후 무려 13년 8개월 만의 일이다. 이날 대법원은 이춘식씨 등 4명이 신일철주금(구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배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은 이씨 등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너무도 당연한 이 판결을 받기 위해 무려 13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인해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된 우리 피해자들의 피눈물이 대한민국 대법원의 이름으로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무척 다행스럽다. 나라 잃은 설움에 더해서 먼 이국땅에서 마치 ‘노예’처럼 일했던 피해자들의 원혼을 생각하면 이제야 이런 판결을 내놓은 우리 모두가 아프고 또 부끄럽다. 너무도 뒤늦은 판결이지만 피해자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의 원통함도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까지 우리가 짚어 볼 대목이 적지 않다. 일제강점 그 자체가 명백한 침략행위이며 불법적 주권침탈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만행을 정당한 것처럼 인정한 우리 사법부의 행태는 치욕적이다. 일본 전범기업들의 승계 과정과 일본 최고재판부의 오만한 판결 내용은 조금만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우리 항소심 재판부까지 일본 사법부의 판단을 인정했다. ‘도대체 어느 나라의 재판부냐’고 묻고 싶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명색이 민주국가의 재판부임에도 불구하고 인류공영의 보편적 대의와 주권국가의 동질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느냐는 강한 질타이다.

일제의 만행,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 대법원은 2012년 5월 “일본 법원의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1심과 2심의 판결을 뒤집었다. 한마디로 일본 재판부의 판결을 수용한 항소심을 다시 심리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서울고법이 2013년 7월 “일본의 핵심 군수업체였던 신일철주금은 일본 정부와 함께 침략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는 등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서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때가 박근혜 정부 집권 첫 해였다. 따라서 정권이 바뀐 뒤에도 대법원의 기조가 그대로 갈지 아니면 정권에 따라 태도가 돌변할지에 여론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서울고법의 판결에 불복한 신일본제철이 재상고하면서 사건이 다시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대법원은 불과 1년 전의 입장만 그대로 유지해도 모든 소송절차가 끝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권이 바뀌자 우리 대법원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심리를 미뤘다. 그 사이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지치고 또 한두 분씩 세상을 떠나고 있었지만 대법원은 시간만 끌었다. 이런 대법원의 태도도 기막힌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국정농단세력과 ‘재판거래’를 하며 박근혜 정권의 입맛에 맞췄다는 소식은 정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굳이 국민적 자긍심을 거론하는 것조차 오히려 사치스러워 보인다. 이런 대법원을 믿고 지금까지 우리가 ‘정의’와 ‘법치’를 말했다는 것 자체가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장구한 역사에 대법원의 지난 ‘반역적 행태’는 반드시 기록돼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역사가 살고 대법원과 사법부가 제 모습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책임자들에 대한 ‘응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직도 이 땅이 일제의 식민지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법부 안팎의 ‘법률 모리배들’이 다시는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없도록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재판거래를 한 대법원 재판부의 실체와 그 이전의 1심과 2심의 재판부 기록도 대한민국 역사에 ‘소중하게’ 남겨야 할 것이다. 후손들도 반드시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행태는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 재판부의 판결을 짓뭉개며 또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덩달아 일본 전범기업들도 그 어떤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더 이상 그 무엇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지난 역사가 이미 증언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 정부가 나서야 한다. 대법원의 판결 결과를 일본에 공식 통보하고 모든 법적, 외교적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국제법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돈 몇 푼을 받아내기 위함이 아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의 명예를 회복하고 일제 만행이 여전히 ‘진행형’임을  세계 각국에 알리기 위함이다. 동시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더 생생하고 더 구체적으로 세계의 양심에 각인시켜야 한다.

우리는 잠시 잊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노예’처럼 일했던 우리 노동자들의 사연을, 그리고 막장 깊숙한 돌무더기나 컴컴한 군수공장 바닥에 새겨진 그들의 피눈물과 원혼을 우리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픈 기억도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소중한 역사이다. 그 통한의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역사’의 심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마치 노예를 대하듯 그 매서운 채찍을 휘둘렀던 일제의 ‘전범기업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과 수 십년 만에 엄청난 자본과 기술로 무장된 일제 전범기업들의 질주, 비록 이 땅에 그들이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그들의 죄상과 이름만이라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최소한의 자존심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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