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묵자 비공에서는 대(大)가 소(小)를 공격하고, 강자가 약자를 능욕하며, 다수가 소수를 겁박하고, 사기꾼이 우매한 사람을 속이며, 귀한 사람이 천한 사람에게 거만하게 굴고,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거만한 불의와 불공정이 당시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했다. 묵자는 ‘흥천하지리(興天下之利), 제천하지해(除天下之害)’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전국시대 제후들 사이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상부는 설득하고, 하부는 가르치는 동안 그의 몸은 장작개비처럼 말랐다. 스스로를 고난의 극치로 내몰면서 용감하게 세상을 구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사회의 추악하고 불공평함이 심할수록 묵자의 각오도 더 강렬하고 절실했다. 그러나 묵자는 자신의 감정을 과격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절실하지 않아서라기보다 좌충우돌식의 처방으로는 근본적인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려면 보다 냉정하고, 이지적으로 총체적 접근방법이 필요했다. 그는 겉에서 속으로, 외부에서 내부로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사회적 병폐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묵자 노문에는 제자 위월(魏越)과의 대화를 통해 세상을 구할 10가지의 핵심을 설명했다. 그것을 ‘묵자십의’라고 한다. 위월이 군주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묵자가 대답했다.

“어떤 나라를 방문하면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을 골라 그것으로 군주를 설득해야 한다. 나라가 혼란하면 상현(尙賢)과 상동(尙同)을 설명해야 한다. 나라가 가난하면 절용(節用)과 절장(節葬)을 설명해야 한다. 음악과 술에 빠져 있으면 비악(非樂)과 비명(非命)을 설명해야 한다. 음란하여 예가 없으면 하늘을 존중하고(尊天) 귀신을 섬겨야 한다(事鬼)고 설명해야 한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면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설명해야 한다.”

세상을 구한다는 묵자의 주장은 헛소리나 억측이 아니었다. 그는 상황에 맞는 강력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수립했다. 확신으로 뭉친 그와 추종자들은 종교적 헌신에 가까운 정신으로 세상을 구하려고 했다. 묵자가 스스로 고생을 감내하며 의를 행한 것은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묵자는 제자들에게 한 나라에 유세할 때 먼저 그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골라 설득하라고 가르쳤다. 시대적 상황을 통찰한 묵자는 5가지 범주의 문제점과 각 범주마다 2가지의 대안을 마련해 묵가십의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국가마다 처한 어려움은 달랐다. 묵자는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현과 상동은 정치적 혼란에 대한 대안이고, 절용과 절장은 경제적 곤란에 대한 대안이다. 한 나라가 지나친 음악과 주색에 빠져 있으면 비악과 비명을 호소하기에 적합하고, 황음무도하여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 하늘을 존중하고 귀신을 섬길 것을 호소하라고 가르쳤다. 다른 나라를 넘보며 약탈과 침략을 일삼으면 겸애와 비공을 호소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묵가의 경쟁자는 주례(周禮)라는 엄격한 계급제도를 앞세워 구체제의 개선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던 유가였다. 공자가 최초의 사학을 열어 창시한 유가는 인(仁)과 예(禮)를 바탕으로 온건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경제적·사회적 변화로 표출하던 다양한 시대적 요구를 흡수하지 못했다. 구제도는 하층계급에게만 고통을 주지도 않았다. 최상층의 귀족과 제후들도 쇠약해진 주왕실의 권위가 천하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며 오로지 자신의 역량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가장 극심한 고통은 하층민에게 가중됐다. 소생산노동자의 고통을 확인한 묵자는 유가의 사상으로는 평화와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가를 경쟁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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