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령을 인가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 1509~11년 제작. 바티칸 서명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 그레고리오 9세는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던 종교재판을 공식화 해 확장시킨 인물이며, 그로 인해 이단 정죄와 마녀사냥이 성행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단 정죄와 마녀사냥은 교회의 거룩함을 지킨다는 명분이었지만, 무자비한 고문과 끔찍한 방식으로 처벌했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 2018.10.30
교령을 인가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 1509~11년 제작. 바티칸 서명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 그레고리오 9세는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던 종교재판을 공식화 해 확장시킨 인물이며, 그로 인해 이단 정죄와 마녀사냥이 성행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단 정죄와 마녀사냥은 교회의 거룩함을 지킨다는 명분이었지만, 무자비한 고문과 끔찍한 방식으로 처벌했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 2018.10.30

중세 종교재판소 세워, 마녀사냥 광풍
무솔리니 히틀러 지지, 전쟁명분 제공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지난 17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는 초대 교황 베드로가 묻힌 자리 위에 자리 잡은 중앙돔과 발다키노(천개, 天蓋)를 기준으로 십자 형태인 대성당 상부에서 이뤄졌다.

1506년부터 약 120년간 재건된 바티칸 대성당은 ‘평화’의 상징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했던 교황과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가 낳은 산물이다. 

교황과 관련해 가톨릭은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을 주장하고 있다. 교황 수위권(首位權)은 교황이 가톨릭교회에서 으뜸가는 권한을 지닌다는 뜻이다. 교황 무류성(無謬性)은 교황이 신앙과 윤리에 관해 권위를 가지고 선포할 때 그 가르침은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절대권력을 인정하는 이 교리로 인해 중세유럽에서는 수천만명이 죽었다. 특히 개신교학자들은 이를 두고 “교황의 권위가 성경 위에 섰다”며 비판한다.

◆교황 권력욕, 종교재판소 세워 ‘마녀사냥’ 

가톨릭이 로마에서 공인(AD313년) 된 후 교황의 권위는 급속히 강화됐다. 그러나 교황권 강화 이후 전 유럽엔 ‘사랑과 자비’가 아닌 ‘이단’ ‘마녀사냥’ 광풍이 불었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며 교황권의 절정기를 이루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1198~1216) 때 종교재판소가 설립됐다. 종교재판소는 이후 약 500년 동안 100만명에 달하는 사람을 처형하며, 교황권의 유지 강화에 이용됐다. 

1229년에는 “일반 신도는 성경을 소유할 수 없고 읽을 수 없으며 번역할 수 없다”는 교황 그레고리 9세(1227~1241)의 교서가 내려졌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도 종교재판에 회부돼 엄벌에 처해졌고, 심지어 화형까지 당했다. 

1318년 교황 요한 22세가 마녀 재판을 이단 심문의 관할 하에 두는 교서를 내리고 이어서 후임 교황들이 잇달아 강화령을 내림으로써 ‘마녀사냥’의 이상 광풍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당시 마녀로 간주돼 화형당한 사람은 적게는 30만명, 많게는 900만명으로 추정된다. 

종교개혁이 이뤄진 뒤에는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항의하는 개신교인(protestant, 항의자)에 대한 학살을 명한 사람도 교황이었다. 실제 종교개혁 당시 수많은 개혁자들은 이단자로 낙인 찍혀 화형을 당했다. 중세 암흑기에 이단이라는 미명으로 죽어간 사람은 5000만~7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 ⓒ천지일보 2018.10.30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 ⓒ천지일보 2018.10.30

◆‘십자군전쟁’ 가톨릭-이슬람 반목 원인 제공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1088~1099)가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명분도 ‘타종교를 용납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11세기말에 시작돼 361년간이나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신의 이름’을 빙자해 치러졌지만, 사실상 교황권 강화를 위해 성지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시작된 전쟁이었다.

십자군전쟁은 오늘날까지 그리스정교회와 가톨릭, 이슬람권과 서구권이 반목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십자군전쟁이 참패로 끝나면서 중세교회는 ‘신의 대리자’로 절대 권력을 가졌던 교황의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봉건주의가 무너지면서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때마침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근대식 인쇄술은 ‘까막눈’이었던 사람들을 깨우며 르네상스를 확대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는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 판매를 선포했다. 120년간 지어진 대성당은 당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거장이 참여했고, 천문학적인 건축비용이 들어갔다. ⓒ천지일보 2018.10.30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는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 판매를 선포했다. 120년간 지어진 대성당은 당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거장이 참여했고, 천문학적인 건축비용이 들어갔다. (사진출처 : 뉴시스) ⓒ천지일보 2018.10.30

◆교황을 위한 대성당, 부패의 끝 ‘면죄부’

중세 가톨릭 성직자들의 부정부패, 비리는 극에 달했다. 교회는 권력과 야합하고 성직매매가 공공연히 자행됐고, 교황청은 수탈의 총본산이었다. 금욕의 계율을 깨고 음란한 생활을 하는 성직자들이 만연했고, 일부 수녀원은 창녀촌 취급을 당했다.

특히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를 넘어설 정도로 막강해지자 교황과 사제들은 성전건축에 열을 올렸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지만 속내는 자신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성전건축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성전건축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온갖 방법이 동원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는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 판매를 선포했다. 배경은 이랬다. 당시 교황청은 바티칸 대성당 건립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 유럽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기부금을 헌납하도록 했지만 액수가 모자랐다.

당시 제후였던 알베르트는 대주교직과 주교직을 임명받으며 푸가가로부터 돈을 빌려 교황에게 막대한 금액을 지불했다. 푸가가는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알베르트가 그에게 돈을 갚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테젤로 하여금 독일에서 면죄부를 팔게 로마 교황청은 조처했던 것이다.

이 ‘면죄부’는 중세 교황청의 부패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꼽힌다. ‘면죄부’를 사면 과거의 죄뿐 아니라 미래에 지을 죄도 미리 사함 받는다고 했다. 교회는 면죄부를 죽은 사람에게도 팔았다. 죽은 사람도 그의 이름으로 돈을 내면, 돈주머니로 ‘땡그랑’하고 돈이 떨어지는 순간 그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교황청의 권위를 악용한 수탈은 바티칸 대성당 건축 11년만인 1517년 종교개혁이라는 중세사 최대의 사건으로 이어졌다. 

1933년 8월 베를린 노이 퀼른 경기장에서 열린 가톨릭 청년집회에서 히틀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성직자들. (출처: 히틀러의 교황 : 비오 12세의 비밀역사) ⓒ천지일보 2018.10.30
1933년 8월 베를린 노이 퀼른 경기장에서 열린 가톨릭 청년집회에서 히틀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성직자들. (출처: 히틀러의 교황 : 비오 12세의 비밀역사) ⓒ천지일보 2018.10.30

◆정치권력과 야합했던 20세기 교황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가 기독교를 공인한 데는 정치 공학적 이유가 컸다. 그는 4분할의 제국을 다시 하나로 합치면서 물리적 해결책이 아닌 ‘정신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 기독교를 공인(313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정치와 로마가톨릭의 공생관계는 십자군전쟁의 참패로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기 전까지 지속됐다.

 중세 교황이 절대권력으로 마녀사냥을 일삼았다면 20세기 교황은 경제, 정치적 이유로 독재정권과 야합하는 비굴한 행보를 보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20세기 2차 세계대전 발발원인 중 하나로 ‘교황이 무솔리니와 히틀러라는 독재자들과 정치적으로 야합한 것’을 들고 있다. 

1922년 교황 비오 11세는 ‘무솔리니는 신의 뜻을 부여받은 인물’이라고 추켜세운다. 가톨릭교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말 한마디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이후 무솔리니는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다. 단일 후보자에 대한 신임 투표였지만 대중들의 지지는 매우 높았다. 

교황 비오 11세는 히틀러도 지지했다. 당시 교황이 독재자를 지지했던 이유는 첫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공산주의로부터 가톨릭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둘째는 파시스트들에게 받는 막대한 경제, 정치적 거래 때문이었다. 1929년에 교황 비오 11세와 이탈리아 수상 무솔리니는 로마의 라테란 궁전에서 일명 ‘라테란 조약’을 맺었다.

1939년 4월 20일 체사레 오르세이노 대주교가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 교황 비오 11세, 12세는 무솔리니, 히틀러 등 독재정권이 자신들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이들을 지지했다. 이는 독재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빌미가 됐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출처: 히틀러의 교황 : 비오 12세의 비밀역사) ⓒ천지일보 2018.10.30
1939년 4월 20일 체사레 오르세이노 대주교가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 교황 비오 11세, 12세는 무솔리니, 히틀러 등 독재정권이 자신들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이들을 지지했다. 이는 독재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빌미가 됐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출처: 히틀러의 교황 : 비오 12세의 비밀역사) ⓒ천지일보 2018.10.30

교황청은 이탈리아를 국가로 승인하고,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에 대한 교황권의 주권을 인정하고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약이다. 또한 바티칸 시는 이탈리아에 대한 세금을 모두 면제 받는다. 게다가 옛 교황령과 재산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탈리아로부터 보상금 7억 5천만 리라와 연 5%의 이익이 보장된 이탈리아 공채를 받았다.

교황의 독재자들에 대한 지지는 이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어서 즉위한 비오 12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침묵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여 비난 받았다. 

오늘날 ‘신의 대리자’ ‘평화의 메신저’로 불리는 교황. 그러나 역사는 수많은 교황이 신의 이름을 빙자한 전쟁과 인권탄압의 주동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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