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많은 성곽(城廓)을 새로 쌓거나 수축했다. 이런 국가적 공역이 7세기 후반 문무왕(文武王) 시기에 이뤄진다. 왜 전쟁이 사라진 시기에 성을 더욱 튼튼히 한 것일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도 이 시기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뤄졌다. 남한강에서 조령으로 통하는 충주 남산성의 축성도 삼국통일 직후 이뤄졌다. 남산성은 중원경 주민들의 보민성으로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신라 성들은 백제 성곽들에 비해 특별히 견고했다. 백제 땅 예산 임존성이나 연산 황산성, 서천 건지산성 등은 견고하지만 대부분 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신라 성곽 유적 가운데는 오랜 역사 동안 퇴락을 거듭했으면서도 비교적 잘 남은 곳이 많다. 충북지역의 경우 보은 삼년산성이나 단양 온달성, 그리고 남산성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는 성을 쌓을 때 국민 의무제를 택했다. 5세기 후반 소지왕 때도 일선군 3천명의 장정들을 시켜 굴산성(屈山城, 이성산성)과 삼년산성을 구축한다. 장병들의 징집은 대개 3년을 주기로 했다. ‘삼년산성’은 이런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3년 시한이 꼭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 열전 효녀 ‘설씨녀(薛氏女)’의 기록을 보면 결혼을 약속한 청년 가실(嘉實)이 3년 안에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약혼자가 죽은 줄 알고 부모 성화로 다른 데로 시집을 가려 했던 설씨녀는 혼례식날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낭군을 만난다. 

신라가 삼국통일 후 성을 확대 구축한 것은 당나라를 겨냥한 것이었다. 전쟁은 사라졌지만 걱정은 당나라였다. 당나라가 신라를 삼키려고 군사를 동원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고구려 남하 루트에 대해 방어망을 새로 구축했다. 해로로는 서해 임진강 유역, 육로는 지금의 연천 –동두천-서울 통로였다. 이 교통로를 봉쇄함으로써 신라는 중요한 위기를 극복 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 야욕이 타격을 받은 것은 임진강 칠중성(七重城) 전투였으며, 그 다음 당과 말갈 연합군 20만명을 괴멸시킨 매초성 전투의 대승은 이런 철저한 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무왕의 이런 대응이 없었다면 신라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문무왕은 운명 직전 자신은 죽어 용(龍)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겠노라고 동해 어구에 장사지내줄 것을 유언했다. 아름다운 동해구, 경주시 감포 연안에 있는 수중릉(水中陵)은 바로 용이 되고자 했던 문무왕의 시신을 모신 곳이다. 문무왕의 이런 호국의지가 거대 제국 당나라의 야욕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안보망이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안보를 튼튼히 못한 유약한 지도자의 오판이 미증유의 비극을 불러왔다. 임진전쟁과 두 번에 걸친 호란이 모두 안보불감증이 만든 비극이었다. 선조, 인조 두 왕은 민심이반을 걱정해 강한 군사를 키우지 못했다. 죽어서까지 호국의 신이 되고자 했던 문무왕과는 정반대였다. 

며칠 전 해안 주둔 포격 부대원들이 자주포를 끌고 나와 파주지역에서 훈련을 했다는 신문 보도를 봤다. 또 군 연구기관이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배치된 해병대 2사단과 육군 7기동군단을 후방으로 옮기는 방안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부대는 전방을 지키고 있는 최고의 정예부대들이다. 북한 핵 문제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만일의 사태를 상정해 보면 가슴이 철렁해진다.  

남북한이 평화를 위한 대화를 지속한다고 해도 국가안보만큼은 철통같아야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철저히 방위망을 구축, 신라를 지킨 문무왕의 고사를 한번 음미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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