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일, 11.6 중간선거 지원유세 차 네바다주 엘코를 방문해 기자들과 만나 “러시아가 합의를 위반했다”면서 러시아와 체결했던 중거리핵전력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의 파기를 공식화했다. INF는 지난 1987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옛 소련의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사거리 500∼5500㎞인 미사일의 생산과 실험, 배치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이 보유한 ‘퍼싱-2 미사일’과 소련의 ‘SS-20’ 등 2619개의 중거리 미사일 전력을 3년에 걸쳐 모두 폐기함으로써 INF는 냉전시대를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아왔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가 2017년 최신예 순항미사일 ‘이스칸데르(SSC-8)’를 발트해 연안에 실전 배치한 사실을 대표적인 조약 위반사례로 꼽고 있다. 이스칸데르의 사거리는 600㎞로 마하 6.1의 속도로 순항하다가 종말비행에서 마하 10 이상으로 속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에, 현존하는 미사일 방어시스템으로는 완벽하게 요격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는 2017년 11월 루마니아와 폴란드가 패트리엇을 배치했고, 지난 7월 나토정상회의에서 폴란드와 발트 3국 등에 4개 대대 병력 4000여명을 배치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항변하고 있으나, 러시아의 이스칸데르 배치는 분명히 INF 위반행위인 것이다. 

이후 미·러 양국은 서로 상대방이 INF를 위반하고 있다며 설전을 벌여왔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INF 탈퇴 발언은 러시아와 중국의 중거리 핵전력 증강을 차단하기 위해 ‘미·중·러가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INF’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의도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미국의 협정탈퇴 강수는 러시아와 중국의 ‘군비증강’을 차단해 유럽과 동아시아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보다 공고히 하겠다는 의도로도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탈퇴 발언 이후 영국 정부와 나토 본부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은 성명에서 “INF는 30년 전 발효된 이후 유럽에서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면서 미·러는 INF를 유지하기 위해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미국 의회도 러시아의 INF 위반을 분명하게 지적하면서도, 백악관이 의회나 우방국들과 상의 없이 INF 탈퇴를 결정한다면 미국의 장기적인 국가이익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2000년부터 2024년까지 러시아를 통치하게 된 푸틴 대통령은 제정러시아 피터대제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구소련 해체의 교훈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1979년부터 10년 동안 아프간 내전에 구소련은 10만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하고도, 결국 1만 5000여명이 전사하고 성과 없이 철군했다. 소련이 아프간 전쟁에 전쟁비용을 최대한 쏟게 만들기 위해 미국은 무자헤딘 반군에게 스팅어 미사일 같은 최신 무기를 제공했다. 결국 ‘소련판 베트남전’이라 일컫는 아프간 내전은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됐을 뿐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성급하게 INF를 파기해 신냉전 체제를 자초할 것이 아니라, 이 조약의 문제점을 보완해 국제사회가 더 이상 강대국들의 핵무기 확산과 군비경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도록 외교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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