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민영익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25
민영익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25

민영익

민영익(1860~1914)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개화 사상가로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이기도 하다. 1881년에 통리기무아문의 12사 가운데 군무사 당상이 되어, 별기군의 교련소 당상관으로서 임오군란(1882년 7월)이 일어날 때까지 별기군의 실무책임자 역할을 했다.

구식군대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최고책임자인 민겸호(閔謙鎬)가 피살당하고 민영익 역시 그 책임자로서 가옥이 파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군란 진압 후,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해 사죄사절로 박영효(朴泳孝)가 파견될 때 김옥균 등과 함께 비공식 사절로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신진개화문물을 견학했다. 1883년 5월 주한미국공사 푸트(L. H. Foote)가 내한하자, 6월에 그에 대한 보빙사의 정사(正使)로 임명돼 친선사절로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외국의 선진문물을 경험한 그였지만 정치적 입장이 보수파로 바뀌면서 개화파를 압박하기도 했으며, 반대파에 몰려 중국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1894년에는 선혜청 당상이 됐으나 고종의 폐위음모사건에 연루돼 홍콩, 상해 등지로 망명하게 됐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행서(行書)에 능했고 그림을 잘 그렸다.

사진 속 민영익의 복식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먼저 갓끈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갓 위에 하얀 장식품은 상아로 만든 것으로 ‘품격’을 나타내는 용도다. 주로 중국에서 귀한 손님에게 선물할 때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동인(개화승)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25
이동인(개화승)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10.25

이동인(개화승)

조선 말기 범어사(梵魚寺) 출신의 개화승 이동인(? ~ 1881)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발전상에 관심을 가지고 밀항, 처음 시찰에 나선 개화파의 선구자이다. 1879년(고종 16) 6월 유대치, 김옥균 등 개화당 요인의 도움으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밀항한 후 변모된 일본 사회를 살폈다. 일본에 수신사로 와 있던 김홍집과 만나 친교를 맺은 후 1880년 9월 김홍집과 함께 귀국했다. 1881년 2월 통리기무아문 참모관에 임명돼 신사유람단이라는 일본시찰단을 파견하는 일을 추진했으며, 이때 유길준, 윤치호와 같은 유학생을 보낸 것도 이동인이 계획한 일이다.

1881년 3월 참모관으로 군함과 총포 등의 구입 임무를 맡아 일본에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출발 직전 실종됐다. 사진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촬영한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