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오래전 일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대학 정문 앞이었다. 청년 하나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이단 옆차기를 날렸다.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상대가 비틀거렸다. 이단 옆차기를 날린 청년이 이어 두 주먹을 바람개비처럼 돌려 상대의 안면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얻어터진 청년의 코에서 두 줄기 피가 흘렀다. 이번에는 맞은 청년 차례였다. 두 손으로 코피를 수습한 청년이 이야~압,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둘이 엉겼고 길바닥에 뒹굴며 흉측한 자세로 숨을 헐떡였다.

그제야 사람들이 나서 싸움을 뜯어말렸다. 먼저 이단 옆차기를 날린 청년이 분이 덜 풀린 듯 말리지 마, 라고 소리를 질렀다. 친구인 듯 보이는 청년이 물었다. 왜 그래? 그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저 XXX, 군대 있을 때 내 고참이었는데, 저 XX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확 죽여 버릴까 보다 XXX!”

아하, 사정을 알 만했다. 군대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선임을 우연히 만났고, 그래 이게 웬일인가 하며 주저 없이 이단 옆차기를 날려 버린 것이다.

당시 군대 갔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하루걸러 한 번씩 꿈에 군대가 등장하던,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어정쩡한 복학생이었던 나는 이 희극적인 상황에 절대 공감하고 말았다.

그랬다. 내 마음에도 이단 옆차기를 날려 복수극을 펼쳐주어야 할 군대 시절 인연들이 있었던 것이다.
눈에 띄기만 해 봐라, 반드시 정의의 주먹을 날려 줄 테다! 하지만 눈에 띄기만 해 보라던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눈에 띄지 않았고 그래서 내 마음속 복수극은 한 번도 성사 되지 못했다. 하여 나는 가끔씩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짜식들, 운 좋은 줄 알고들 살아!

군대 있을 때 “사회 나가서 보자”고 하는 건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정말 좋은 인연인 것 같으니 이 인연 여기서 끝내지 말고 사회서도 계속 이어가자, 라는 것. 참 좋은 말이다. 다른 하나는 너 사회 나가면 죽을 줄 알아, 다. 군대에서는 복수해 줄 수 없으니 제대하고 사회 나가면 당한 만큼 앙갚음을 해 주겠다는 것이다. 한 맺힌 다짐이다.

하지만 복수가 이뤄졌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까마득한 시절 학교 정문 앞에서 이단 옆차기를 날리던 그 청년의 모습만은 마치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에 선명하지만, 군대 시절 원한을 속 시원히 풀었다는 뉴스는 들은 적이 없다.

이제는 꿈에서도 거의 사라진, (아주 가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린다든가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마구 뒹굴며 총질을 하는 꿈을 꾸고선, 아이쿠 꿈이었구나, 천만다행이다,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군대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얼마 전 등장한 이런 뉴스 때문이다.

<여군 상급자에 “너 몇 살이야, XX야” 軍하극상 ‘당나라급’> <선임에 “죽어볼래?” 쇠파이프 위협> <하극상·성희롱·욕설…한국軍은 당나라군대?>… 아이쿠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그 시절 이단 옆차기를 날리던 장발 청년 이야기하고는 다른 차원 아닌가! 그 장발의 청년이 제대를 하고 사회에 나왔지만, 푸르고 아팠던 그 시절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온 몸으로 날려야 했던 그 이단 옆차기는 뭔가 우스꽝스럽고 해학적인 광경이라면, ‘여군 상급자에 너 몇 살이야, XX야’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침통하며 또한 비극적인 상황이다.

이래서는 군 기강이 서지 않고 또 지휘체계가 어떻고 그리하여 국방력이 어찌어찌해지고 하는 이야기들은 고상하신 분들이 하시고, 나는 다만 군대에도 평화와 사랑, 자비가 가득 넘쳐 나기만을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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