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오키나와는 1429년 류큐(琉球)왕국으로 통일돼 450년간 지속되다가 메이지 시대인 1879년에 일본에 복속돼 오키나와(沖繩)현이 됐다. 1945년 3~6월 미국과 일본의 최후 격전지로 변모한 오키나와는 섬 전체가 초토화됐고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일본군은 상륙한 미군과의 전투에서 9만 4000여명이 전사했고, 미군의 전사자도 1만 2600여명이었다. 오키나와 주민 12만명 등 희생자는 무려 23만명에 달했다. 일본군은 강제징용한 한국인 1만여명을 인간방패 삼아 전쟁을 벌였고, 오키나와 주민에게는 투항해서 포로가 되기보다 옥쇄(玉碎)를 강요했고, 일본군이 조직한 ‘오키나와의 소년부대’에 의해 많은 주민이 학살됐다. 

이 소년부대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에게 기밀을 누설할 것을 두려워한 일본군이 살생부를 만들어 자국민을 차례차례 죽이기 위해 만들었던 게릴라부대였다. 더군다나 일본군들은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다는 명목 아래 일부러 말라리아가 창궐한 하테루마 섬으로 강제로 이주시켜 많은 오키나와인들을 병들어 죽게 만들었다. ‘오키나와 소년부대’와 하테루마 사건은 일본제국의 승리를 위해 자기 국민들을 자기 군대가 직접 죽인 테러요 만행이었다.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은 전후에도 이어져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 본토는 미군의 군정에서 벗어난 반면, 오키나와는 여전히 미군 점령 하에 남겨졌다. 이후 미군의 강압적 점령정책으로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는 일본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 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주일 미군시설은 75%나 들어차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여전히 미군의 점령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본토의 차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전쟁은 일본 역사교과서에 제대로 실리지 않고 있다가 2006년에 발간된 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를 통해 처음으로 그 실체가 알려졌다. 이 교과서에는 “한반도에서 무려 1만명이 오키나와로 끌려와 진지구축과 탄약운반에 동원됐고, 100개가 넘는 오키나와의 ‘군위안소’에 조선여성이 수용됐다"고 기록돼 있다. 오키나와 평화기원공원에는 20만명의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가 있는데, 거기에는 한국 국적의 조선인 231명과 북한 국적의 조선인 82명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로 추정되는 여성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일본은 아직도 위안부를 시인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남부 오키나와를 비롯해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등에 묻혀 있는 조선인 군인·군속의 유골은 2만 2천구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은 전쟁의 맨 앞에서 소모품처럼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전쟁 막바지에는 미군의 폭격과 일본군의 집단학살에 의해 죽어갔다고 한다. 오키나와 전쟁 종전 7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희생자들의 확인 작업은 더디기만 하다. 우리 정부는 오키나와에 잠들고 있는 한국인 유해 발굴 조사 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며, 일본 정부도 이에 성실히 협조해 주기를 당부하고 싶다.  

진정으로 사과한 적도 없고 이미 한 사과조차 매번 뒤엎는 일본 극우정권의 행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과거 일본제국은 한국인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사과한다면 우리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일 양국은 더 이상 증오하는 이웃이 아니라, 가깝고도 친한 이웃이 되도록 서로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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