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vs 혈통… 후계자 선출 문제로 나눠져

[천지일보=최유라 기자]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들을 익히 ‘무슬림’이라고 총칭한다. 하지만 무슬림도 두 개의 큰 종파로 나누어져있다. 바로 수니파와 시아파다.

수니파는 무슬림 인구의 90%, 시아파는 무슬림 인구의 10%를 차지할 만큼 두 종파는 규모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출범 배경에서 엿볼 수 있다.

610년 알라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했지만 632년 그가 후계자를 세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혈통주의 논쟁을 벌인 양 세력이 두 종파로 나뉘게 된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교를 유지시킬 후계자를 세워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에 선거로 선출하는 전통적 방법을 택해 무함마드의 절친한 친구이자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를 제1대 칼리프로 뽑는다.

하지만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로 인정하지 못하는 무리가 있었다. 이들은 무함마드의 혈통에서 나온 자만이 칼리프로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를 적격자로 내세웠다. 뒷날 이들이 시아파를 형성하는 주축 세력이 된다.

이후 제2대 칼리프는 우마르, 제3대 칼리프는 오스만이 뽑혔지만, 656년 알리가 제4대 칼리프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발생해 시아파가 분리됐다.

제3대 칼리프 오스만이 새벽기도 중 암살을 당해 그 배후를 밝히기 전, 알리가 제4대 칼리프로 선출되면서 양측 갈등이 고조된 것이다.

이에 오스만 6촌 동생이자 당시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 총독으로 있던 무아위야가 오스만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알리 추종자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알리의 승승장구한 전투력에 밀려 궁지에 몰리자 무아위야가 협상을 구했고 협상에 응한 알리의 행동이 화근이 돼 무아위야가 호전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661년 알리는 협상 반대파들에게 살해된다.

이후 무아위야는 무아위야 왕조를 세워 선출 대신 자신의 아들 야지드에게 칼리프위를 세습했다. 분노한 시아파는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을 중심으로 무아위야 왕조와 전투를 벌였지만 전사한다.

현재 남아있는 소수의 시아파 세력은 후세인을 순교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후세인이 팔을 잘려 부상당한 날을 이슬람력 1월 10일 ‘타슈아’, 11일 ‘아슈라’로 정해 추모축제를 연다.

특히 행사에는 외세에 살해당한 후세인을 지키기 못함을 자책하고자 참석자들이 실제 징이 박힌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자학하는 행동을 한다.

이렇듯 오늘날 이 두 종파 간의 깊어진 갈등은 쉽사리 해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문제를 관여하는 데 있어서도 기여하는 바가 큰 이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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