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간이식인협회 이상준 회장. (한국간이식인협회 제공)

다시 시작된 열정의 삶

[천지일보=이지수 기자] 높고 청아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독서의 계절 가을을 알리는 9월. 책이 가득한 곳에서 이상준 회장을 만났다. 그는 출판사 사장이자 선교사다. 그에게 ‘한국간이식인협회 회장’이란 직함이 하나 더 생긴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1988년 국내 최초 간 이식 수술이 있은 후 1992년, 각 병원에서 7명이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이식받은 7명 중 현재 살아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며 그가 바로 이상준 회장이다. 그 당시 아산병원 부원장의 조카가 교통사고를 당해 눈, 신장, 간을 기증한 것.

이 회장이 간 이식을 받은 지는 올해로 만 18여 년째. 그는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결혼 후 몇 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무역과 공해방지시설업체 회사를 창업했다.

하지만 순조롭게 잘 운영되던 회사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후부터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의 권유로 1982년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기도원에서 일주일간 하루에 생수 여덟 잔씩 마시며 금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를 보던 중 말씀이 그의 가슴속에 들어와 그를 울렸고 믿음의 싹을 틔웠다.

“고등부 교사, 중고등부 부장, 청년부 부장으로 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 즐거웠어요. 그리고 침례교단에서 집사안수를 받았죠.”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이상을 느꼈다. 집 근처에 있는 병원을 찾아 종합검진을 받았고 결과는 ‘간경화’였다. B형 활동성 간염을 앓다가 이미 간경화로 진행된 것. 그리고 앞으로 남은 기간은 1년 정도.

“가족 모두가 B형 간염 예방 백신을 맞을 기회가 있었어요. 너무 바쁘기도 했지만 나한테 꼭 필요할까란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만 접종했죠.”

그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서 부모님보다 건강하게 더 오래 살아서 부모님 가슴에 못 박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회장은 부모님보다는 더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원래는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했어요. 당시 서울아산병원의 정영화 선생님이 미국으로 추천해 주시려고 했죠. 그러다가 서울아산병원에서 기증자가 나타났다고 연락이 왔어요.”

23시간의 긴 수술을 견디고 그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이후 이 회장은 뜻밖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됐다. 이 회장보다 40일 먼저 간 이식 수술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간 이식 수술 후에 복용해야 하는 약인 헤파빅은 의료보험이 되지 않아 굉장히 고가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인 사정이 여의치 않아 헤파빅을 맞지 못하고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게다가 인천에 사는 50대 어떤 환자도 수술 후 매달 들어가는 약 값을 감당하지 못해 자식들을 힘들게 한다며 자살했다는 소식도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도 40여 일마다 약값을 200만 원 이상을 지불해요. 병원 가는 날은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의료보험 문제가 시급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뇌사자에 대한 관련법이 제정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인 근거가 없어 의료보험 적용이 안됐던 것.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해나가기 위해 이 회장은 간 이식 수술을 시행하고 있는 병원 다섯 곳(강남성모, 삼성서울, 서울대, 서울아산, 신촌세브란스)의 모임을 합쳐 ‘한국간이식인회’를 조직, 2001년 5월 7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발족했다.

▲ 제1차 장기 및 조직 기증 홍보를 위한 교육 기념사진 (한국간이식인협회 제공)

2001년 7월 1일 드디어 노력의 결실로 국민건강보험재정안정 및 의약분업 정책 종합대책이 발표됐다. 그동안 50% 보험적용이 되던 고가의 헤파빅이 20%로 경감됐으며 현재는 10% 본인 부담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또 하나의 과제가 있었다.

“신장 이식인들이 5급장애인으로 지정돼 각종 혜택을 받는 것처럼 간 이식인도 받아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평생을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병원에 다녀야 하는데 교통비와 각종 부대비용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많이 들거든요.”

이어 2003년 7월 간 이식인도 장애인으로 지정됐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회장은 많은 사람들과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간 이식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 “선진국의 경우 운전면허증 발급시 불의의 교통사고 등으로 뇌사자가 됐을 때 장기를 기증하겠느냐 물으면 85% 정도가 동의해 면허증에 ‘도너’라는 표기를 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기증받아야 할 사람에 비해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이 제도를 도입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는 수술 후 벅찬 감격으로 어떻게 살까를 생각했다. “수술 후 직원들의 장래가 보장되는 곳으로 회사를 넘기고 영혼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선교활동을 하고 싶은 소망이 생겼죠.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어요.”

이 회장은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는 ‘서로사랑’ 출판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이 회장은 <인생의 의문점들> 등 ‘알파코스’와 관련된 자료들을 발간하고 매년 영국에 가서 배우고 토론하면서 알파코스에 매료됐다.

“알파코스는 이 시대 최고의 전도 프로그램이에요. 전도 대상자들을 ‘게스트(Guest)’라고 표현하죠. 이는 최고의 손님으로 모시겠다는 뜻이에요.” 그는 알파코스를 한국교회에 소개하면서 기쁨에 충만했다.

수술 후에도 그는 일을 쉬지 않았다. 재작년부터 건강을 챙기며 지방에 농장을 만들어 주말이면 농장에 가기도 한다는 이상준 회장. 현재 그의 삶은 하루하루가 감사함이다.

“나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보내줬던 모든 분들과 사랑하는 부모님, 가족과 형제들 그리고 친지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소중한 분들 곁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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