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가 12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한국문화재재단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민족의 공동유산 씨름’을 주제로 열린 2018 무형유산 국제심포지엄에서 발제하고 있다.ⓒ천지일보 2018.10.13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가 12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한국문화재재단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민족의 공동유산 씨름’을 주제로 열린 2018 무형유산 국제심포지엄에서 발제하고 있다.ⓒ천지일보 2018.10.13

2018 무형유산 국제심포지엄
그림·문헌 속 샅바 착용 담겨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씨름 기술은 원래 손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인 18세기부터 다리씨름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는 12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한국문화재재단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민족의 공동유산 씨름’을 주제로 열린 2018 무형유산 국제심포지엄에서 “다리씨름이 성행한 배경이 샅바의 출현 때문”이라며 이를 처음으로 발견하게 됐다고 밝혔다.

씨름은 올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추진 종목이다. 씨름은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 사이에 고대로부터 행해진 풍속이었다. 씨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다리 기술을 이용하지만 이 형태를 갖춘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림 속 샅바 등장

심 교수에 따르면, 18세기 초반에는 조선에서 씨름을 ‘각희(脚戲)’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각희란 곧 다리씨름을 말한다. 원래 씨름을 각력(角力), 각저(角觝), 각저(角抵)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각희’라고 부른 것은 다리씨름의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샅바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샅바에 관한 첫 사료는 김홍도의 씨름도(18세기 말)에서 확인된다. 그림 속에는 샅바를 한쪽 다리에만 걸고 허리샅바는 매지 않았다. 그 모습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신윤복의 그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두 그림에서의 공통점은 다리샅바만 매고 씨름을 한다는 사실이다.

한손으로 샅바를 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춤을 잡으며 씨름하는 모습은 다리씨름을 발달시켰다. 실제로 김준근의 그림에서 다리샅바를 잡고 씨름하는 모습을 ‘각희(脚戲)’라고 썼다. 

조선시대 화가인 김홍도의 그림 '씨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화가인 김홍도의 그림 '씨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문헌상으로 샅바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조운종의 시문집인 ‘면암유고(1821)’에서다. 단오 날 씨름판의 모습을 묘사했는데 “샅바를 돌려 허벅지에 묶은 건강한 사내, 다리기술 현란하고 손기술도 다양하네”라는 시구가 담겨있다. 여기서 샅바를 뜻하는 ‘반건(蟠巾)’이 처음 확인된다. 반건은 곧 허벅다리에 거는 샅바를 뜻하는데 줄여서 ‘바’라고도 불렀다.

이처럼 문헌상의 기록은 실제 그림 속 샅바와 일치한다. 이는 18세기에 등장한 샅바가 곧 다리샅바였음을 분명히 말해주는 증거다.

심 교수는 “이 무렵 샅바가 출현한 이유는 자세하지 않다”며 “다만 빠른 승부를 내기 위한 목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밝혔다.

원래 씨름의 승부는 한 사람이 상대자가 없을 때까지 겨루는 ‘지워 내기’라는 연승제 방식이었다. 또한 기존에 아무 것도 착용하지 않는 민둥씨름이나 허리에 띠를 두르는 띠씨름의 경우 장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17세기 이후에 씨름판에 참여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자, 승부를 빠르게 내기 위한 방식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며 “다리에 샅바를 매는 방식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샅바가 생겨나자 상대와 밀착한 상태에서 다양한 기술이 가능했고,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승부가 펼쳐져 씨름의 묘미를 더했다. 결국 18세기 샅바의 등장은 힘과 함께 손과 다리를 이용한 기술씨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샅바씨름’ 내지 ‘바씨름’을 탄생시켰다.

한국문화재재단 진옥섭 이사장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천지일보 2018.10.13
한국문화재재단 진옥섭 이사장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천지일보 2018.10.13

◆고구려 고분벽화 속 씨름

한편 한국 씨름의 역사는 지금부터 1700년 정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주의 통구(현 중국 길림성 집 안)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각저총(4세기 말)에는 씨름의 모습이 처음 확인된다.

각저총의 씨름 모습은 고구려 장천 1호분(5세기 중엽)의 벽화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다만 장천 1호분 벽화에는 씨름의 모습이 흐릿해 허리띠가 있는지 없는지 정확치는 않다.

그럼에도 두 벽화는 고구려인의 삶과 문화에서 씨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문헌상에는 14세기 초반인 고려 말에 등장한다. 1330년(충혜왕 즉위) 3월에 왕이 나라의 업무를 총애하는 대신에게 맡기고 날마다 내시들과 각력희(角力戱, 씨름의 일종)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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