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김성완 기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평화나눔연구소 주최로 12일 서울 중구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에 열린 ‘가톨릭 선구자 장면 학술심포지엄’에서 관련 전문가들이 논의하고 있다.ⓒ천지일보 2018.10.12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평화나눔연구소 주최로 12일 서울 중구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에 열린 ‘가톨릭 선구자 장면 학술심포지엄’에서 관련 전문가들이 논의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8.10.12

5.16쿠데타로 실각… 평가 180도 달라져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 전쟁에서 장면 박사가 초대 주미 대사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담판을 짓고 미국과 UN의 한국 파병을 끌어내지 않았다면 우리나라가 공산화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평화나눔연구소는 12일 서울 중구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에서 열린 ‘가톨릭 선구자 장면 학술심포지엄’에서 “그리스도인 정치인으로서 가톨릭 사회 원리를 실천하고자 했으나 5.16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졌다”면서 “정치가로서, 평화를 위한 가톨릭 선구자로서 장면에 대한 재해석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나눔연구소는 이어 “해방 전후의 현대사에 대한 평가는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며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번 학술 토론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12월 파리 UN 총회에서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공식 승인받은 지 70주년을 기념하고 아울러 장면 박사의 업적을 돌아보는 한편, 우리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참된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할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토론회 축사에 나선 염수정 추기경은 “(장면 박사가) 5.16쿠데타로 퇴진한 것은 정권 수호보다는 혁명군을 진압할 경우 생기게 될 인명 피해를 막는 것, 즉 생명 수호를 더 큰 의무로 확신한 결과”라며 “그런데도 지금까지 특히 정치가로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집권 세력의 쿠데타 합리화를 위한 사실 왜곡에서 자유로웠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면(張勉)은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는 천주교 선교 사목 활동을 했다. 특히 동성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할 때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중간에서 도맡아 방어하는 역할을 전담했다.

1945년 해방은 그에게 정계 진출의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몸을 담았다. 이후 그는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 추천으로 국가 건설 사업에 가톨릭을 대표해 참여했으며, 교황 비오 12세 등의 지원을 받아 파리에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제3차 파리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단의 수석대표로 파견돼 국제사회에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UN과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해 지원을 이끌어냈다. 1955년 민주당 창당을 주도하고 제4대 부통령을 지내며 이승만 독재에 저항한 야당 지도자였으며,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민주주의 황금시대를 꽃피웠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는 정치 활동이 금지된 정치인으로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다.

토론회에서 나선 홍성군 창원대 교수는 먼저 장면 박사에 대한 일부의 평가를 소개했다.

일례로 최근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죽음과 관련해 쓴 글에서 유종호 교수는 “5.16은 민주당 신파 장면 정권의 붕괴가 구파의 정권 획득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대통령 윤보선의 미련한 희망적 관측과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졸장부 총리 장면의 잠적으로 쉽게 성사됐다”며 “도대체 국가의 존망과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가 안경도 쓰지 못한 채 거처에서 도망쳐 금남의 집인 수녀원으로 숨어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조롱했다.

홍성군 창원대 교수에 따르면 장면의 생애는 가르멜 수녀원 54시간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나뉜다. 그전까지 그는 실패와 좌절을 몰랐다. 한국 현대사의 빛나는 발자취이자 한국 천주교회사를 빛내는 일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수녀원 54시간은 현실적으로 완전한 패배였다. 사람들과 교회의 평가도 정반대로 바뀌어 그는 손쉬운 조롱과 비난거리가 되고 만다.

홍 교수는 이 같은 시각에 대해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수녀원 54시간은 장면의 무능과 비겁이 드러난 자리가 아니다”며 “도리어 그곳은 그의 진정한 인간적인 깊이와 강함이 드러난 자리였다”고 힘줘 말했다.

이어 “무고한 피를 흘리느냐 치욕의 가시면류관을 받아 쓸 수밖에 없느냐는 곤경에 처해 치열한 내적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며 “그가 머물렀던 수녀원은 장면에게는 수난을 앞둔 겟세마네동산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장면은 그 싸움에서 마침내 평화를 선택함으로 자기 이름을 찾는 인간 본성을 누르고 이겨냈다”며 “참으로 위대한 인간 승리”라고 추켜세웠다.

장면의 해방 후 정치 활동 등에 대해서도 논의됐다.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어찌 보면 장면은 분단과 냉전을 주도한 이승만과 정치적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보수적 반공주의자로 볼 수도 있다”며 “하지만 장면이 정계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일종의 격변기고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지식인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적 이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방 전후의 현대사를 퇴영·침체·좌절의 늪이 아니라 한국인이 자유·평등·민주주의 등 보편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발전적 시기로 보는 입장에서는 그는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국공로이자 이승만 독재에 맞선 민주투사로 평가할 수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허 교수는 또 “장면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다”며 “가톨릭 정신의 참된 구현이 한국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발전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고 그 이상을 실천하려 한 가톨릭 정치가였다”고 설명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