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막강했던 거란의 요는 흥종(興宗)과 도종(道宗)의 시대에 이르러 국력이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흥종은 여력이 있었지만 서하의 도전을 극복하지 못했다. 서하의 조상은 선비족의 갈래인 당항(黨項) 출신 척발적사(拓跋赤辭)로 황하의 상류에 살다가 정관(貞觀) 초기에 당에 귀화해 태종 이세민(李世民)에게 이씨성을 하사받고 조공국이 됐다. 그의 후예가 섬서성 하주(夏州)에 거주하면서 평하부(平夏部)라는 호칭을 얻었다. 당말 황소(黃巢)의 난에서 평하부 추장 척발사공(拓跋思恭)이 공을 세워 정난(定難) 절도사로 임명됐다. 당은 철발사공에게 이씨성을 하사하고 하국공으로 봉했다.

척발사공의 후손은 오대에서 북송 초기까지 기미관계를 유지했다. 송태종 태평흥국5년(980), 이계봉(李繼捧)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2년 후 송에 투항했다. 반발한 이계천(李繼遷)은 은주와 하주를 자주 침공했다. 북송은 이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옹희(雍熙)3년(986), 요에 항복한 이계천은 하국왕이 되어 북송을 계속 괴롭혔다. 송은 이계봉을 정난군절도사로 임명해 이계천을 견제하고, 조보충(趙保忠)이라는 성명까지 하사했다. 또 이계천이 거짓 항복하자 은주절도사로 삼아 조보길이라는 성명을 하사했다. 그러나 이계천은 여전히 소란을 피웠다. 송은 이계륭(李繼隆)에게 이계천을 토벌하게 했다. 이계천은 도망쳤다가 송진종 조항(趙恒)이 즉위하자 송의 변경을 방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송이 정난절도사로 임명했지만, 이계천은 여전히 약탈을 일삼았다. 이계천이 토번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들 이덕명(李德明)은 송과 요에 양다리를 걸쳤다. 그의 시대에는 북송과 큰 마찰이 없었다. 그는 아들 이원호(李元昊)를 시켜 위구르족이 차지한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감숙성 일대를 차지했다. 이덕명 사후에 이원호는 올라 감숙, 섬서, 청해의 일부를 차지했다. 그가 서하의 창업군주 경종(景宗)이다. 중국인들은 이 왕조를 자기들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이원호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해 정부조직을 개편하고 한족들을 중용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중국화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의 문자를 창제해 한문과 불교를 번역했으며, 국호를 대하(大夏), 수도를 지금의 영하성 은천시인 흥경부로 정했다. 이후 그는 전력을 다해 송을 침범했다. 

송은 하송(夏竦)과 범옹(范雍)이 대패하자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을 파견해 지구전을 펼쳤다. 견디지 못한 이원호는 송과 화의했다. 송은 이원호를 하국왕으로 봉하고 해마다 은 25천량, 비단 153필, 차 30천근을 주기로 합의했다. 서하와의 전쟁으로 송은 심각한 재정의 위기를 초래했다. 서하는 송에게는 공격적이었지만, 요에게는 저자세를 유지했다. 요는 서하를 지원해 송의 서북방을 위협함으로써 동북방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요와 서하는 결혼동맹을 체결했다. 제위에 오른 후 이원호는 요에 반발했다. 1044년, 이원호가 요의 흥종이 이끈 군대를 격파했다. 이원호가 아들에게 살해되자, 송은 이원호의 어린 아들 이량조(李諒祚)를 하국왕으로 봉했다. 요의 흥종은 다시 서하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송, 요, 서하는 끊임없는 소모전을 펼쳤다. 1086년, 북송과 서하에서 모두 황제가 바뀌었다. 서하는 여전히 요의 지원을 받아 송을 침범했지만 송과 서하의 오랜 전쟁은 북송이 멸망하고 남쪽으로 옮기면서 끝이 났다. 서하는 1225년 요가 망하고 2년 후에 멸망했다. 이전투구의 시대에 고려는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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