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임금 세종.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훈민정음은 대표적인 업적이다. 유네스코는 한글이 세계 많은 글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당대 많은 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글 창제를 밀어붙인 세종의 의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세종은 동궁시절부터 글을 좋아했다. 한번 책을 잡으면 밤을 새는 일이 많았다. 평소 과식과 운동 부족이었을까. 세자는 몸이 비대해진다. 아버지 태종도 아들의 비만을 걱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은 젊은 시절에 이미 당뇨를 앓고 있었다. 그것은 만년에 실명을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세종은 터부시 했던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과 평원대군마저 세상을 떠났다. 금슬이 좋았던 소헌왕후마저 운명하자 불교에 집착하게 된다. 궁중에 내불당을 지어 왕후와 자녀들의 명복을 빌겠다고 나섰다.

유림들과 중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전국 유림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성균관 유생들도 동조 파업을 감행, 학교를 비우고 나와 시위를 벌였다. 유생들은 임금을 독부(獨夫)에 비기기까지 했다. 독부란 ‘인심을 잃어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외로운 남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세종도 이에 맞서 이런 비난에도 불구 ‘나는 무식하니 내 뜻대로 하겠다’고 내불당을 밀어붙였다. 이 시기 세종은 당대 고승이었던 신미대사를 만났다. 신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불교 회향에 참석케 하고 법문을 들었다. 

신미를 궁중으로 부른다는 것은 또 책잡히는 일이었다. 따라 다니며 임금의 행동을 기록했던 사관들의 눈을 피해 비밀리 이루어진 것 같다. 

세종은 신미를 만나 불경강독을 들었다. 여러 불경 가운데 세종이 가장 애착을 보인 것은 바로 ‘능엄경(楞嚴經)’이다. 왜 세종이 이 불경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것이었을까. 한글 창제이후 두 번째로 서둘러 간행된 것도 바로 ‘능엄경 언해’였다. 

능엄이란 ‘한량없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악한 법(法)을 버리고 좋은 법을 지니게 한다’는 뜻이다. 세종이 특별히 흥미를 보인 것은 ‘진언(眞言, 다라니)’이었다. ‘진언을 외우면 누구나 악업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부유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부 불교학자들 사이에선 한글창제의 모티브가 세종이 다라니를 많은 백성들에게 널리 암송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불교의 진언을 보면 실제 한글을 많이 닮고 있다. 신미는 범어(梵語)에 능통했으며 능엄경에 가장 밝은 승려였다.

한글의 ‘범자(梵字) 기원설’은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일찍이 용재총화를 지은 성현(成俔, 1439~1504)은 “훈민정음은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실학자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도 “우리나라 언서(한글)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 모양을 본떴다”고 했다. 

능엄경을 우리글로 번역한 ‘능엄경 언해’는 세종이 살아있을 때 아들 수양대군(세조)에게 지시한 것이었다. 그것이 세종 생전 시에는 간행되지 못했다. 세조는 즉위해 제일 먼저 번역작업을 착수했다. 능엄경 언해 발문에는 ‘어역(御譯)’이라고 하여 세조가 직접 번역한 것이라고 했으나 실은 신미대사 조력이 가장 컸다. 

세조는 생전에 신미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평생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세조가 병을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청주에 들러 신미가 머무는 속리산까지 거둥한 사실은 그 특별한 인연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임금의 행차가 속리산 험준한 말티재를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일이 572돌 한글날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 본뜻은 바로 백성들의 행복과 건강, 안녕을 기원한 데 있었던 것인가. 한글날을 맞아 다시 한 번의 세종의 위민(爲民)에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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